영화 ‘그녀가 말했다’(마리아 슈라더 감독)는 2017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수많은 성범죄를 저지른 유명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관한 취재기를 담았다. 하비 와인스타인은 영화 미팅을 핑계로 스태프나 배우들을 호텔로 불러 비슷한 패턴으로 8~12건 이상의 성범죄를 저질렀다. 뉴욕타임스 보도는 이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보도 이후 와인스타인에 대한 82건의 고소가 이어졌다. 2020년 2월 와인스타인은 23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어쩌면 이 영화를 보겠다는 마음은 크지 않을 수 있다. 미국의 가장 저명한 매체에 속한 엘리트 기자들의 취재기. 정의감 넘치는 탐사보도, 퓰리처상. 이같은 단어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영화가 처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3대 일간지 ‘보스턴글로브’ 탐사보도팀이 세상에 알린,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 취재기를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떠오른다. 스포트라이트와 ‘그녀가 말했다’의 큰 줄기는 같다. 기자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하지만 피해자들은 말을 아끼고 생각처럼 기자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가해자들은 뻔뻔한 해명을 하며 기자는 협박을 받거나 어려움에 처하고, 그럼에도 기자는 사건을 파헤치고,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며 특종에 성공하는 스토리.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뻔한 스토리일 것같은 예감과 129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이 영화를 그냥 지나치기엔 아쉽다. 영화는 특종을 해낸 두 기자들의 현실적 문제, 취재를 하면서 드는 고민, 취재원에 대한 실망과 짜증, 그럼에도 고마워하게 되는 감정, 기사를 써도 변하지 않는 세상에 기자들이 회의주의와 싸우는 모습, 취재 때문에 일상을 방해받는 여성들의 감정을 세세하게 비춘다. 그들을 그저 ‘정의로움에 취한 기자’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특히 여성 기자들의 현실과 고민을 디테일하게 꾹꾹 눌러 담은 연출도 공감을 끌어낸다.

“폭로해도 바뀐 건 없잖아” 회의주의 빠진 기자의 모습

메건 투히 기자(캐리 멀리건 배우)는 조디 캔터(조 카잔 배우)의 선배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 트럼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제보를 받고 폭로 기사를 작성했다. 그의 기사는 화제가 됐지만 그럼에도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투히는 “어차피 기사를 써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어. 결국 트럼프가 당선됐잖아”라며 회의적 태도를 갖게 된다. “결국 기사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때마침 임신한 그녀는 휴직한다.

아기를 키우느라 정신없는 투히에게, 하비 와인스타인 성범죄를 취재하게 된 후배 조디 캔터는 전화를 건다. 캔터는 와인스타인에게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를 만나는 데까지 성공하지만 피해자는 “이걸 누설하고 고소 당하면 어쩌죠. 뉴욕타임스가 법적 지원을 해줄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캔터는 회사가 법적 지원을 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다시 입을 다문다. 캔터는 선배에게 전화해 “트럼프한테 당했다는 사람, 기사 쓰자고 어떻게 설득한 거야?”라고 묻고, 선배 기자는 자신도 믿지 않는 말을 한다. “변할 수 있다고 설득해야지.”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산후 우울증에 걸려버린 투히는 예상보다 빨리 복직하게 된다. “일하는 것이 우울한 나에게 더 도움된다”는 이유로 복직한 그녀. 그리고 와인스타인 성범죄를 취재하고 있는 후배와 팀을 이루게 된다. 투히는 또다시 성범죄 기사를 쓰는 것을 꺼려하는 모습이다. “와인스타인에게 여배우들이 당했다고 하는데, 기자는 사회적 약자를 위해 기사를 써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여배우가 진짜 사회적 약자가 맞아? 그들은 이미 너무 큰 마이크를 가지고 있잖아.”

후배 캔터는 “여성 배우들은 오히려 이걸 이야기했다가 커리어가 끊길까봐 말을 못하고 있어. 게다가 배우들도 입을 못여는데 스태프들은 어떻겠어. 이런 사람들도 말을 못하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성범죄를 당했다고 어떻게 얘기하겠어”라고 설득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언하고 설득하며 한발 한발 나아간다.

취재 과정에서의 집념도 돋보이지만 기자들이 겪는 어려움 역시 디테일하게 묘사됐다. 특히 두 기자 모두 자녀가 있기에 아이를 돌보면서 전화를 받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그들은 항상 아이가 칭얼거리거나 아이를 돌보다 겨우 잠들었을 때 중요한 전화들을 받는다. 집에 있을 때 중요한 전화를 받는 때마다 남편들은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분노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출장에서 돌아올 엄마만 기다리는 아이와 전화하면서 우는 기자의 장면 등도 표현된다.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저널리즘에 대한 후회’ 느낀 기자에 필요한 영화

육아의 고됨에 더해 취재원들은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반면 취재가 진행될수록 가해자 측은 뉴욕타임스 취재를 막으려 압박한다. 그럴 때마다 여성 기자들은 작은 일에도 의심하고 겁을 먹는다. 가해자 측은 기자들의 신원을 알고 있을 뿐더러 아이들과 함께 사는 집 주소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택시를 타면서 “왜 저 길로 안 가고 터널로 가는 거지?”라고 말하는 장면(그 뒤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더라도)이나 바짝 뒤따라 오는 승용차에 지레 겁을 먹는 장면, 비행기를 타고 취재원을 만나러 갔지만 취재원 남편만 만날 수 있었고 취재원 남편이 “왜 여기까지 왔느냐”며 언성을 높이자 겁을 먹고 도망치는 장면, 가해자 측이 뉴욕타임스에 전화해 협박해도 남성인 데스크는 쉽게 함께 언성을 높이고 무례하게 전화를 끊기도 하지만 여성 기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싸움을 만들지 않으려는 장면 등. 이런 장면은 지금까지의 ‘특종 기자’를 다룬 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영화 '그녀가 말했다' 스틸컷.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두 기자는 여러 피해자들을 만나 입을 열게 한다. 성범죄 이후 ‘다시는 이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작성한 피해자들도 만나게 된다. 만나줄지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해외 출장을 떠났다가 허탕을 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도의 핵심 증거가 될 서면 합의서와 녹취록을 확보해 나간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고 깔끔하지도 않다. 그들은 서로 “이 취재를 맡은 걸 후회해?”라며 어려움을 공유한다.

이 영화는 정의로운 특종 기자들의 취재 방식을 궁금해하는 기자들보다, 저널리즘에 대한 회의에 빠진, 그래서 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는 기자들에게 더 필요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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