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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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병원 응급실 취재를 나갔어요. 정말 그런 장면은 처음 봤어요. 구급차 수십 대가 들어오고, 환자들이 실려 나오는데 죽은 사람들이 엄청 많은 거예요. 환자들이 쏟아지고, 의사들, 간호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다들 소리 지르고…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어요. 취재를 하긴 하는데, 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래도 그때는 괜찮은 줄 알았어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자꾸 졸려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선생님, 왜 이러죠? … 갑자기 눈물이 나요… 정말 괜찮았는데…”

이태원 참사 취재 기자가 정찬승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위원장)에게 털어놓은 저 말들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반응”이다. 트라우마는 재난‧폭력‧죽음 목격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국립정신건강센터가 7일 주최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보도 가이드라인 발표회’에서 정찬승 전문의는 “이태원 참사부터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세월호 등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재난 현장이 언론인에게는 일터다. 특히 사진‧영상 기자는 더욱 현장에 근접한다. 봐도 되는 장면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중 일”이라며 일상에 가까울 수 있는 언론인 트라우마를 우려했다. 그는 “현장에 없었어도 재난 당사자 트라우마를 취재하는 언론인도 2차 트라우마를 경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사를 쓰고 난 뒤에도 기자들은 트라우마를 경험한다. 정찬승 전문의는 “특히 많은 여성 기자들은 온라인에서 디지털 괴롭힘을 경험한다. 인터넷 폭력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슷하거나 더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적한 뒤 “기자들은 사건‧사고‧재난의 최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아직까지 정신건강 지원의 필요성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언론계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스룸이 언론인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지원방법을 마련해야 우수한 기자의 이직을 줄이고 좋은 뉴스를 전달할 수 있다”면서 “슬픔이 울분이 되지 않도록 언론인들의 역할, 전문의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국가트라우마센터장인 심민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지난 10년간 사회재난이 136건, 자연재난은 20건이었다”며 재난이 일상화되는 시점에서 언론현장에 필요한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재난보도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2021년 11월부터 약 1년간 언론인‧학자‧정신건강전문의 등 전문가집단 자문회의를 거쳐 마련했다. 심민영 전문의는 “가이드라인이 지향하는 것은 재난 당사자와 가족뿐만 아니라 언론인을 포함한 업무종사자, 뉴스이용자 등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재난 보도”라면서 “(가이드라인에는) 취재 보도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최소화하고 회복을 지향할 구체적 방안을 담았다”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은 준비‧취재‧보도 단계로 나뉜다. 준비단계에선 △언론사는 재난 보도 트라우마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연간 1회 이상 교육을 시행한다 △기자는 재난 현장 정보를 적극 수집하고 언론사는 기자가 취재에 적합한 건강상태인지 점검한다고 명시했다. 취재단계에선 △재난 당사자의 신체와 심리상태를 확인한 후 취재를 시작한다 △재난 당사자의 자발적 의사를 바탕으로 취재를 진행한다 △재난 당사자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를 유지한다 △언론사는 기자의 신체적·심리적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고 트라우마 예방과 대응조치를 취한다고 명시했다. 심민영 전문의는 특히 “취재단계에서 섣부른 위로, 성급한 일반화에 따른 표현은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보도단계에서는 △재난 당사자 및 가족의 사생활과 인격을 존중한다 △재난 당사자에게 낙인이나 부정적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보도를 지양한다 △보도 시 심리적 고통을 가중할 수 있는 표현이나 자료가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재난 당사자와 재난업무 종사자, 지역공동체의 복구·회복 활동에 대한 보도는 사회 통합과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재난 보도 시 재난 심리지원 등 사회지원서비스 정보나 콘텐츠를 함께 안내한다고 명시했다. 심민영 전문의는 “기자의 과거 경험, 현재 스트레스, 건강상태에 따라 트라우마 위험도가 다를 수 있어 이를 고려해 업무 배치가 이뤄져야 한다. 이는 기자의 역량, 책임과 무관하다”고 강조했으며 “재난 현장 취재에 기자를 단독 파견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서수민 서강대 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는 “20세기 최고의 보도사진, 네이팜탄을 맞아 울부짖으며 뛰어오는 베트남 소녀의 사진을 연구한 적 있다. 끔찍한 디테일 때문에 당시 미국 보도사진 내규에 어긋나 게재 불가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를 어길만한 가치가 있다는 AP통신의 고집과, 전쟁의 비판적 여론에 힘입어 게재됐다”며 참사 보도의 주요한 사례를 언급한 뒤 “미국과 한국 모두 언론인의 훈련시스템 자체가 어디 던져놓아도 기사를 갖고 살아올 수 있는 군대같은 측면이 있다. 기존 보도 시스템의 관성이 있기 때문에 교육과 체크리스트 등을 통한 주입식 매뉴얼화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서수민 교수는 “특히 시각물을 다루는 언론인을 위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했으며, 덧붙여 “외주화‧비정규직화된 카메라 기자나 해외 프리랜서로 일하는 통신원들, 디지털 뉴스룸에서 소셜미디어를 필터링하는 젊은 비정규직 언론인들의 정신건강도 우려된다”며 불안정노동자들을 언론계가 외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또 “산불‧홍수 피해지역 어르신 보도에서 공감 표현이 과해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 같아 불편한 경험이 있었다”며 “(뉴스가) 공감‧격려‧옹호를 적극 표현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다. 이 부분도 (뉴스룸의) 훈련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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