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멀티버스’라는 말, 많이 들어봤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라 갸웃했던 적 있을 것이다. 한글로 풀면 ‘다중우주’다. 영화에서는 은하계의 무수한 행성에 '또 다른 나'가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으로 흔히들 활용한다. 마블 영화에서는 타노스와 맞서는 어벤져스 멤버들이 활약하는 주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양자경도 다중우주로 나섰다. 입소문이 이어지고 있는 신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통해서다. 다만 가상의 히어로 세계가 아닌,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아줌마 에블린(양자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다. 치매 걸린 아버지 돌보랴, 탈세 조사를 나온 까칠한 세무 당국에 성실하게 소명하랴, 여자친구를 온 가족에게 소개하겠다는 딸을 만류하랴 숨 돌릴 틈이 없이 바쁜 에블린은 남편이 자기 몰래 이혼서류를 준비해뒀다는 걸 알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 억척스러웠던 삶, 대체 무슨 의미일까.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포스터.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포스터.

무기력에 빠진 에블린을 각성시키는 건, 다중우주에서 자신을 찾아온 어떤 존재다. 그는 에블린에게 무수한 세계의 ‘또 다른 나’를 보여준다. 그중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지 않은 나’도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대가로 내 꿈은 포기한 셈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어떤 마음인지 알 것이다. 그때 결혼 안 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공교롭게도 결혼하지 않은 에블린은 배우의 꿈을 쫓아 그 세계의 톱스타가 돼 있다. 뿐만인가. 이 우주의 에블린은 요리사가 되기 위해, 저 우주의 에블린은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해 자기만의 수련을 해나가고 있다.

다행스러운 건 이 영화가 못 이룬 꿈을 애석해하는 데 그치는 패배주의적인 관점에 빠져 있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거다. 에블린에게 다중우주의 존재를 알려준 이는 경고한다. “당신,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 다중우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빌런을 막을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다고.” 상상도 해본 적 없는 미션을 부여받은 에블린은 이내 정신을 바짝 부여잡고, 마치 게임 속에서 타인의 능력을 추출해오듯 ‘또 다른 나’들의 능력을 다운로드받아와 전투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한다. 이 우주와 저 우주의 현실이 마구 뒤섞이는 극도의 혼란스러운 체험 끝에 그저 무기력한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해나간다.

물론 관객으로서는 이 여정이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에블린의 각성 과정은 흡사 신종 팝아트 영상처럼 실험적인 전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다중우주를 오가는 영상의 속도감이 무지막지해 종종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데다가 항문, 남근 같은 소재를 유머 요소로 내세운 강력한 B급 코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뭐지, 이 미친 전개는?’ 싶은 순간도 있으리라 본다.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스틸컷.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스틸컷.

영화가 허무맹랑한 다중우주 판타지로 휘발되지 않고 다시 한번 힘을 받는 건 빌런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다중우주의 빌런은 다름 아닌 에블린이 가장 아끼는 딸이다. 어쩌면 타국에서 터를 잡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애써온 에블린만큼이나, 가치관의 충돌 사이에서 자란 이민2세대 딸 역시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 위해 애써왔을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간 끝에 허무를 찬양하는 심오한 존재가 돼버린 딸이라는 빌런을 구해야만 하는 엄마 에블린의 이야기는 이제 흔한 판타지 다중우주물에서 귀한 가족간의 이야기로 치환된다.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에블린을 서운하게 했던 남편의 세심한 진의도 드러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을 보니 내 눈에 눈물이!”라고 했다. 그것은 어쩌면 에블린이 세금 조사의 타깃이 된 이민자이자, 치매 노인을 돌보는 딸이자, 억척스럽게 생계를 주도하는 아내이자, 딸을 지키려는 엄마로서, 무엇보다 그 삶을 ‘선택’한 주체로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힘을 내는 이야기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단 한 번도 게으르게 산 적 없었지만 손에 쥔 현실은 뭔가 애매하다고 느껴질 때,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한 반복 같을 때, ‘그때 결혼 안 했더라면…’ 싶은 생각이 들 때,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당신의 삶에 분명한 의미가 있으며 당신에게는 숨겨진 저력이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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