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없이 OTT 서비스에 들어가 갈피를 못 잡고 예전에 봤던 영상을 틀고 끄기를 반복하는 일이 잦은데, 그렇게 소환하는 콘텐츠 중 하나가 MBC 드라마 <애인>(이창순 연출, 최연지 극본, 1996)이다. 거기에는 마치 1980년대 일본 거품 경제 시대의 현란한 아날로그 아니메를 보는듯한 최면효과가 있다.

배경으로 등장한 개장 7년차 롯데월드 어드벤쳐는 새것처럼 반짝이고 30대 초반의 황신혜와 막 40대에 들어선 유동근의 매력은 대단하다. 테마파크에서 황신혜와 우연한 만남 이후 집으로 돌아온 유동근은 넓은 욕실의 월풀 욕조에서 아이들과 함께 목욕하다가 그녀를 떠올린다. 짐작컨대 90년대 초반 조성된 일산 1기 신도시의 전원주택이었을 테다. 해외 팝송을 적극 차용한 세련된 음악, 탐미적인 영상, 핫 플레이스였던 압구정동의 멋진 카페와 음식점도 몽환적이다.

▲ MBC 드라마 ‘애인’
▲ MBC 드라마 ‘애인’
▲ MBC 드라마 ‘애인’ 스틸컷.
▲ MBC 드라마 ‘애인’ 스틸컷.

그리고 이 황홀경은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로 박살날 것들이기에 더욱 아련하다. 건축 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는 유동근은 외환위기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벤트 회사 기획 담당 차장인 황신혜도 마찬가지다. 일산의 전원주택도 오랜 기간 강남에 밀려 수십 년 간 집값은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드라마 말미에 각자의 가정을 지킨 이들의 선택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듯싶다. 수많은 가정이 외환위기 앞에서 붕괴되었다.

현실화된 파국 직전의 태평성대가 시간이 지난 뒤 제공하는 즐거움은 한 편으로 이제는 돌아가지 못할 좋았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상승·추락의 아득한 격차, 다른 한 편으로는 다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 그리고 마침내, (저들은 인식 못했을) 파국이 찾아왔다는 것을 잘 아는 전지적 효능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과거지사가 제공하는 안전한 거리감은 비교적 편안하게 예전의 영광을 추억하게 만드는 기제이다.

그러나 진짜로 눈앞에 종말이 도래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모든 것은 현재화되며 나를 지켜줄 간격은 사라진다. 비록 최근 한국영화가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거듭 상을 섭렵하고 K-pop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글로벌 OTT 서비스는 따로 한국 드라마 카테고리를 꾸릴 정도로 우리 대중문화는 건국 이래 최고의 전성기에 올라와 있지만 지금 눈앞의 화려한 대중문화는 위기를 감추는 당의정이 아닐까라는 불신이 엄습한다. 전지구적 전염병의 창궐과 고환율·고유가·고물가의 삼중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요동치는 국제정세 및 해마다 강도를 더해가는 기후위기는 대중문화 바깥의 현실에 심각한 위기의 경고음을 울리는 중이다. 그럴진대, 골프장을 찾는 예능, 수십 인분의 고기를 폭식 수준으로 해치우는 먹방,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모호한 재태크 솔루션, 변호사·의사·검사 등의 고소득 전문직이 수놓는 드라마를 안심하고 불 수 없을 노릇이다. 도래할 위기의 모든 원인을 대중문화에 돌릴 수 없지만 위기를 위기로서 인식하지 못하게 했다는 측면에서 대중문화의 흠결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 책 ‘애인 : TV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 표지. 사진=알라딘
▲ 책 ‘애인 : TV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 표지. 사진=알라딘

1997년 겨울, 일군의 소장 학자들이 주도해 <애인: TV 드라마, 문화 그리고 사회>를 출판했다. 지금은 모두 한국 대중문화 학계의 원로이자 거목이 된 이들이다. 그들은 불륜을 비난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당시 30대 고학력 서울 거주 중산층의 삶을 긍정하며, 텔레비전 드라마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자신하였다. 책의 첫 장을 열은 전규찬은 “엄밀히 말해서 드라마 <애인>에 쏟아진 비난의 담론은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텔레비전, 특히 연예 오락 부문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불만이 결정적 계기를 맞아 표출된 것에 다름 아니다”고 비장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들 논의에서 곧 닥칠 외환위기에 대한 징후는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국가부도를 예측한 이는 극소수였기에 외환위기의 징후를 읽어내지 못했다는 비난은 가혹하다. 그러나 과거의 교훈을 통해 현재를 아는 지금, 오늘의 대중문화가 다가올 위기를 은폐한다는 이야기를 이제는 늦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는 거품 속에서, 거품을 키우며, 거품 위를 위태로이 떠다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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