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다 보고 며칠 내내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경우가 있다. 2019년 개봉한 ‘에이프릴의 딸’이 그랬다. 젊은 엄마 에이프릴(엠마 수아레스)이 어린 나이에 임신한 딸을 따돌리고 그의 남자친구를 빼앗는다. 예비 장서 사이로 봐도 될 사이의 성적인 장면까지 여과 없이 연출되더니 나중에는 딸이 낳은 자식을 빼앗는 전개로 이어진다. ‘엄마’ 하면 애정이나 헌신이 떠오르는 평범한 관객 중 한 명으로서 심리적 충격이 꽤 오래 이어졌다. 이 논쟁적인 영화로 미셸 프랑코 감독은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심사위원상을 탔다.

이런 작품이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영화를 대중적인 ‘예술’이라고 볼 때, 현상을 유지하는 것보다 현상을 의심하게 하는 쪽에 가까운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올드보이’(2003)나 ‘피에타’(2012)도 금기시되는 근친상간을 주요 소재로 다루면서 칸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일반적 도덕관념을 따르지 않는 파격 앞에서 사람들은 정형화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생각하고, 때때로 협소한 인식을 확장한다. ‘에이프릴의 딸’이 남긴 찜찜함이 희미해질 때쯤 이 영화가 ‘여자에게는 당연히 모성애가 있을 것’이라는 사회 통념을 거칠게 깨부쉈다는 판단이 들었다.

▲ (왼쪽부터)영화 ‘에이프릴의 딸’, ‘피에타’, ‘올드보이’ 포스터.
▲ (왼쪽부터)영화 ‘에이프릴의 딸’, ‘피에타’, ‘올드보이’ 포스터.

‘예술’의 의미는 그러나, 보편적인 가치관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을 낙관하게 만드는 데에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성에 의문을 품고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건 하루에 수십 개쯤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 뉴스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각자 삶의 아픈 경험 때문에 세상과 사람을, 최후에는 자기 자신마저 회의하게 된 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믿게 하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설령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이야기가 결론에 도달할 때쯤 관객이 삶을 낙관할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창작자라면, 그가 바로 지쳐있는 이를 가장 힘 있게 위로할 수 있는 예술가일 것이다.

4일 개봉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은 그런 종류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 중 하나다. 영화는 우연히 시작된 대화 때문에 불거지는 질투, 성적 충동, 무안함 등의 감정을 깊이 있게 다룬다. 최소화한 연출과 단조로운 공간 안에서 오직 대화로만 상황을 풀어나가는 감독 특유의 입담에 힘입어 주인공의 불온한 욕망과 좌절은 세세하게 구현된다. 그러나 감독은 반전과 유머를 덧대 이야기 자체의 흥미를 취할 뿐, 주인공들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거나 혐오스럽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순간 관객이 그것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끔 유도하거나, 시간을 5년쯤 건너뛰는 과감한 생략의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 영화 ‘우연과 상상’ 포스터.

이런 접근의 진의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은 아무래도 마지막 에피소드일 것이다.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성의 동창에게 자신의 오래된 비밀을 고백하지만 뒤늦게 사람을 오인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때 나츠코의 진실한 마음을 느낀 상대방이 보여주는 세련되고 따뜻한 대응은 기대 이상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감독은 누구에게나 입 밖에 내기 곤란한 감정이나 치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이 우연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타인을 불신하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긍정하고 인생을 잘 살아낼 이유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 영화 ‘우연과 상상’ 스틸컷.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쁜 방법을 이용하지 않아도, 우연은 당신을 예상치 못한 장소로 데려가 놀라움을 안길 것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지난해 미국 뉴욕필름페스티벌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한 말은 그가 왜 일본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지 가늠하게 한다. 사람을 의심하기는 쉬워도 믿기는 어려울 때, 예술이 우리를 충격에 빠트리기는 쉬워도 위로하기는 어려울 때, 우연일지 상상일지 모를 흥미로운 이야기 끝에 관객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는 품격 있는 작품과 만나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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