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죽더라도… 제 죽음이 정세라 앵커의 눈으로 확인되고… 정세라 앵커의 입을 통해 보도되면 하… 너무 기쁠 것 같아요…”

9시 뉴스 시작을 앞두고 보도국으로 불길한 제보 전화가 걸려 온다. 자신을 콕 짚어 자살을 보도해달라는 섬뜩한 요청에 정세라 앵커(천우희)는 ‘장난 전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끊지만, 내내 찜찜한 마음을 털어내지 못한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 소정(이혜영)은 오히려 특종을 단독 보도할 기회가 아니냐며 제보자의 집을 찾아가 보라고 딸을 부추긴다.

▲ 영화 ‘앵커’ 스틸컷.
▲ 영화 ‘앵커’ 스틸컷.

3월20일 개봉하는 정지연 감독의 ‘앵커’는 성공한 젊은 언론인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야기를 다룬 장르영화다. 방송국에서 벌어지는 자살 제보 사건으로 초반 눈길을 끌면서 밀폐된 뉴스룸에서 벌어지는 ‘더 테러 라이브’(2013)의 긴박함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는 만큼, 스릴러를 선호하는 관객의 관심은 충분히 끌어내는 작품이다.

스릴러, 호러, 미스터리 같은 장르영화에서 ‘공간’은 특색 있는 긴장과 공포를 조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침대 아래서 발을 잡아당기는 귀신 형상으로 일상적인 침실을 한순간에 두려움의 장소로 바꿔버린 ‘컨저링’(2013), 티스푼으로 찻잔을 비비는 독창적인 응접실 최면 시퀀스로 흥행에 성공한 ‘겟 아웃’(2017)같은 작품의 공통점은 이야기 맥락과 특정 공간이 쫀득하게 맞물리면서 관객에게 신선한 장르적 경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방 탈출 콘셉트를 극대화한 ‘이스케이프 룸’(2019), 자원 배분과 계급 문제를 노골적으로 시각화한 ‘더 플랫폼’(2019)은 공간 그 자체가 힘이라고 할 만큼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 스릴러물로 평가받는다.

▲ 2019년 3월 개봉한 영화 ‘이스케이프 룸’과 2020년 5월 개봉한 영화 ‘더 플랫폼’ 포스터.
▲ 2019년 3월 개봉한 영화 ‘이스케이프 룸’과 2020년 5월 개봉한 영화 ‘더 플랫폼’ 포스터.

그런 면에서 ‘앵커’에 기대할 만한 재미 중 하나는 방송국이라는 공간에서만 연출할 수 있는 특색 있는 서늘함일 것이다. 정지연 감독은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아무도 없는 스튜디오에 카메라 장비만 있을 때, 방송국이 무서워 보일 것 같았다”고 공간 선택의 배경을 전했다.

그런데 결과물을 뜯어보니, 방송국 공포 상황은 공간과의 접점이 부족한 ‘해프닝’처럼 연출된 측면이 크다. 프롬프터 글자가 흔들려 보이거나 뉴스 출연자 발목에 밧줄이 감기는 식의 착시 현상, 생방송 도중 목이 졸리는 듯한 환각 현상 같은 식이다. 장소를 방송국이 아닌 국회, 법원, 병원 같은 제3의 공간으로 바꾸고 주인공 직업을 앵커가 아닌 국회의원, 판사, 의사 같은 다른 전문직으로 바꿔 놓아도 별로 문제될 게 없는 일차원적인 긴장감 조성이다.

영화의 맥락을 다시 짚어본다. 정지연 감독은 “앵커라는 직업이 성공한 여성의 이면을 보여주기에 신선할 것 같았다”고 했다. 11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는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아이를 갖는다는 게 굉장히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파헤치고 싶다는 의도가 작품 깊숙이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곱씹어보면 ‘앵커’는 장르영화 그 자체의 재미보다는, 성공한 여성이 어떤 연유로 겪어온 심리적 압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장르영화 콘셉트를 차용한 듯한 결과물에 가깝다. 정세라 앵커가 겪는 혼란의 원인이 드러나는 순간, 애써 숨겨왔던 미스터리마저 힘을 잃고 진부해진다는 건 더 문제적이다.

▲ 영화 ‘앵커’ 포스터.
▲ 영화 ‘앵커’ 포스터.

서늘함이 부족한 ‘앵커’의 방송국에서, 관객은 충분한 장르적 쾌감을 얻고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주인공의 직업이 꼭 앵커여야 했고 사건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꼭 방송국이어야 했다면 ‘앵커’는 그 이유를 장르적 화법 안에서 충실하게 납득시켜야 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정서만큼 중요한 게, 장르 구현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다. 모든 장르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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