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와 방송사의 형식적 계약이나 프로그램 개편이 근로자성을 부정하거나 ‘해고’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최초의 판단이 나왔다. 전북지방노동위원회는 KBS전주총국 방송작가의 부당해고를 인정한 판정문에서 해당 작가가 법적 근로자이자 부당해고의 피해자인 이유를 상세히 짚었다.

앞서 전북지노위는 지난해 12월9일 KBS전주총국 ‘생방송 심층토론’ A작가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인정했다. A작가는 2015년 KBS전주총국에 입사해 라디오 작가와 SNS 기획을 거쳐 2019년부터 TV방송 ‘생방송 심층토론’에서 일했다. 2020년 사측 요구로 처음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작성한 A작가는, 지난해 6월 계약서상 기간만료를 앞두고 사측으로부터 계약종료 결정을 통보 받았다.

지노위는 70여쪽에 이르는 판정문을 통해 부당해고 판정 근거를 설명했다. 보통 지노위 초심 판정문은 상대적으로 간소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분량이다. 지난해 3월 최초로 방송작가 근로자성을 인정한 중앙노동위원회의 MBC ‘뉴스투데이’ 작가 부당해고 구제신청 판정문은 40쪽가량이었다. 내용 면에서도 전북지노위 판정문엔 방송작가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한 전향적인 판단들이 포함됐다.

상당한 분량의 ‘방송작가 노동자성’ 설명…“계약은 형식에 불과해”

10일 입수한 판정문을 보면 지노위는 A작가와 사측의 작가 집필계약이 형식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집필계약은 그간 사측의 ‘쉬운해고’에 악용되곤 했다. 실제 이번 심문 과정에서 KBS 사측도 ‘A작가는 문화예술분야 용역계약을 맺어 방송프로그램 원고를 집필’하는 역할이었다며, 계약 내용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부수적인 업무들은 ‘용역계약’의 본질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KBS전주총국 방송작가 A씨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인정한 전북지방노동위원회 판정문 일부
▲KBS전주총국 방송작가 A씨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인정한 전북지방노동위원회 판정문 일부

그러나 지노위는 “당사자가 체결한 계약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은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 감독 하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관계”라 판단했다. 실제 A작가는 PD·보도국장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소속 팀원 내지 부하 직원으로 취급됐다”는 것이다. 지노위는 “(프로그램) 구성 활동 대부분은 사회적 영향이 큰 시사 프로그램의 특성상 근로자가 독자적으로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계약 체결이 동등한 관계에서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지노위는 “(집필계약은) 예술인복지법 시행, 국회 지적 및 KBS의 방침 변경으로 서면 계약서를 체결해야 하는 필요성에 따라 그간의 관행과 달리 사용자가 우월적 지위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근로자로서는 이를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집필계약서는 사용자의 일방적인 의사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계약 해지와 단기간에 계약이 해지되는 것을 방지하여 방송작가의 고용불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집필계약서에 기재된 1년의 계약기간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판단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개편은 ‘경영상 결정’, 근무시간·장소 관련 ‘정규직도 코로나로 재택’

많은 방송사들이 계약종료 사유로 내미는 ‘개편’ 역시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노위는 “프로그램 개편 또는 폐지는 사용자의 경영에 관한 의사결정일 뿐”이라며 “근로자가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 라디오 작가를 2년7개월 일해 왔고, 직전 구성작가도 4년6개월을 근무한 것에 비춰 보면, 심층토론 방송작가로 계약을 체결할 당시 묵시적으로 기간제 계약을 체결했다고 볼 만한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매일 출근 시간·장소가 고정되지 않았다고 근로자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판단도 이어졌다. 정규직으로 고용된 근로자들도 선택적 근로시간제,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만큼 ‘근로 시간·장소’는 탄력적으로 변동 가능하다는 것이다. 임금의 경우 “당사자 간 약정에 따라 시간급, 일급, 주급, 월급으로 지급하는 것은 임금 산정 방식의 차이일 뿐이므로 주급으로 지급했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성을 부인해선 안 된다”고 명시했다.

▲지난해 12월 KBS전주총국 앞에서 A작가 복직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진행됐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지난해 12월 KBS전주총국 앞에서 A작가 복직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진행됐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이 같은 점에 비춰 지노위는 KBS가 계약서상 기간 만료를 이유로 일방적인 계약종료를 통보한 것은 해고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냈다. A는 업무 수행이 불가할 정도의 책임 있는 사유가 있거나 자발적으로 이직하거나 ‘심층토론’이 폐지되지 않는 한 종사할 수 있는 근로자이며, 사측은 근로자 의세에 반해 해고의 서면 통지 절차 없이 구두 통보를 했다고 지노위는 밝혔다.

A작가를 대리하는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판정문”이라고 의미를 짚었다. 김 노무사는 “보통 ‘계약서’라는 문서가 존재하는 순간 법원이든 노동위든 무조건 계약서 편을 들어왔다. 전북지노위는 적극적 해석과 실질적 판단을 통해 아무리 봐도 A작가가 ‘1년만 일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라 설명했다.

개편을 앞세워 방송작가를 쉽게 자르는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김 노무사는 “이제는 봄, 가을 개편 의미가 없어지고 방송사들은 수시로 개편을 한다. 과연 ‘개편 시점’ 명시가 기간을 정한 계약이냐는 것과 관련해 노동위는 그렇지 않다고 봤다. 이런 판단이 나온 첫 사례”라며 “개편을 이유로 드는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앞으로 이 판정문이 근거로 인용될 수 있게 될 것 같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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