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보다 가상 인물들에 의한 허구적 이야기 비중이 더 크고, 이승만과 장택상이 여운형을 암살하도록 지시한 것처럼 허위사실이 명확하게 적시됐다고 볼 수 없으며 허구를 기본으로 하는 드라마 성격상 예술적 표현으로 허용되는 범위다.”

2007년 5월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유족들이 KBS 드라마 ‘서울1945’(2006년 1월7일~2006년 9월10일 방영)가 고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KBS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하면서 밝힌 내용이다. 이 전 대통령과 장 전 총리 유족들은 2006년 8월 KBS 서울1945가 이 전 대통령과 장 전 총리를 ‘여운형 암살’의 배후인 것처럼 묘사해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소송을 냈다.

2007년 KBS 서울1945에 대한 명예훼손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서울1945를 연출한 윤창범 PD는 판결에 대해 “재판부가 팩트와 허구를 잘 분석해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결과”라며 “앞으로는 이런 문제와 관련해 소송이 남발되지 않아야 하고 창작 활동이 위축되지 않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관련 기사: 법원, KBS ‘서울1945’ 손배소 기각

KBS ‘서울1945’ 윤창범 PD·작가 무죄]

경남 합천 영상테마파크 KBS드라마 촬영장. 사진출처=미디어오늘 자료 사진. 
경남 합천 영상테마파크 KBS드라마 촬영장. 사진출처=미디어오늘 자료 사진. 

역사적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허구의 콘텐츠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논란은 현재 진행 중이다. 최근 JTBC 드라마 ‘설강화’가 민주화 운동 폄훼와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미화 등 역사 왜곡 논란 중심에 섰다. 방영 중지 요청을 담은 청와대 국민 청원은 21일 기준 31만명 동의를 받았다.

‘드라마 설강화 방영중지 청원’이라는 이름의 청와대 청원글은 △JTBC 측은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이 간첩인 남주인공을 운동권으로 오인해 구해줬고 △이는 민주화 운동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며 △안기부 소속인 서브 남주인공이 간첩인 남주인공을 쫓아갈 때 배경음악 ‘솔아 푸르른 솔아’가 나오는 것이 부적절하고 △전 세계에서 시청할 수 있는 OTT플랫폼에서 해당 드라마가 방영되므로 외국인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알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JTBC 토일드라마 ‘설강화 : snowdrop’ 관련 티저 이미지. 사진=JTBC 홈페이지
▲JTBC 토일드라마 ‘설강화 : snowdrop’ 관련 티저 이미지. 사진=JTBC 홈페이지

지난 3월 SBS ‘조선 구마사’가 역사 왜곡 논란으로 방영 2회 만에 폐지되기 직전처럼 드라마 광고사들이 광고를 철회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20일 설강화 제작을 지원한 치킨업체 ‘푸라닭’ 측은 “제작사 및 방송사 측에 설강화와 관련된 일체의 제작 지원 철회와 광고 활동 중단을 요청했다”는 공지를 올렸다. 설강화는 조선 구마사 전례를 밟게 될 것인가.

시청자들의 불편함과 반발은 얼마든지 드러낼 수 있지만 SBS 조선구마사 사례처럼 폐지 사태로 결론이 나는 것은 우려스럽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푸라닭 치킨 홈페이지의 공지문. 
▲20일 푸라닭 치킨 홈페이지의 공지문. 

“설강화가 중단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역사 글을 연재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산하의 오역’을 운영하는 한 방송사 PD는 “서울1945라는 드라마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우익 정치인들에 대한 묘사에 분노한 사람들이 손해배상 청구를 걸기도 했었다”며 “설강화의 시놉시스를 보고 웃음이 난 것은 사실이다. 1980년대 여대생 기숙사에 뛰어든 북한 공작원과 한국 여대생의 사랑에 웃음만 났다. 그러나 드라마를 중단시켜야 한다는 분노에는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여운형 암살의 용의자는 김일성부터 이승만까지 당시 극좌와 극우의 파노라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많고, 끝내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드라마 서울 1945 제작진의 상상은 장택상과 이승만의 후예들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방송은 중단되지도 않았고, 끝내 승리를 거뒀다”며 “설강화가 처참하게 망하기를 바랄지언정 그 방송이 중단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방송사 PD는 21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도 1965년 이만희 영화감독의 ‘7인의 여포로’가 북한군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시련을 겪었던 사례를 설명하며 “드라마를 비판하는 것은 자유지만 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65년 영화감독 이만희 구속”]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1965년 작)는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 등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1965년 작)는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 등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실화모티프 스토리 전문기획사 ‘팩트스토리’의 고나무 대표는 21일 통화에서 “개인적인 감상으로, 설강화의 간첩 캐릭터가 운동권으로 가장한다는 설정 자체는 불편하게 느껴졌고 일부 시청자들이 불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또한 창작이나 저작물은 그 자체로 신성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안 보기 운동’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국가기구로 하여금 방영 중지 등 제재를 해달라는 청원의 방식은 큰 문제라고 본다. 특히 이 드라마가 15세 이상으로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고 말했다.

고나무 대표는 “간첩이라는 캐릭터 설정은 이미 한국의 웹툰, 소설, 영화 등에서 가끔 장르의 장치로 활용된 적이 있는데, 이번 드라마는 이를 민주화 운동가와 연결시킨 설정 때문에 선을 넘었다는 논란을 산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선’을 찾는 일은 제재가 아닌 논쟁으로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고 대표는 “최근 드라마를 소비하는 시청자들이 소극적 시청자가 아닌 적극적 팬덤 집단이므로, 제작진이 드라마 소비 흐름에 대해 사전에 얼마나 준비했는지는 시청자에게 설명해야 할 몫”이라고 덧붙였다.

“예민한 소재에 섬세하지 못한 제작… 폐지는 창작자 위축 우려”

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2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조선구마사에 이어 설강화에서도 허구의 콘텐츠에 대해 역사 왜곡 잣대를 들이밀며 비판이 이어지는데, 비판은 가능하지만 광고를 철회하라는 식으로, 폐지로 몰고 가는 것은 문제”라며 “그렇게 따지면 ‘쉬리’와 같이 남북관계를 그린 수많은 콘텐츠들은 역사왜곡이 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 역시 “비판은 필요하지만 비판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가 문제”라며 “설강화가 아주 예민한 소재를 드라마로 가지고 왔으면서도 그만큼 섬세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지난 조선 구마사 논란 당시 설강화가 이미 논란이 된 적 있는데 논란 이후 어떠한 조치를 했는지 잘 느껴지지 않아 안이함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조선 구마사 사례처럼 귀결되는 것에 큰 우려가 된다. 시대극 작가들은 큰 위축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JTBC 드라마 ‘설강화’
▲ JTBC 드라마 ‘설강화’

드라마를 제작한 JTBC 측은 역사 왜곡 논란은 앞으로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해소될 것이라며 창작 자유와 제작 독립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냈다.

JTBC 측은 21일 “설강화에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은 지난 1, 2회에도 등장하지 않았고 이후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신 ‘역사 왜곡’과 ‘민주화 운동 폄훼’ 우려는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오해의 대부분이 해소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 드라마에는 부당한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억압받는 비정상적인 시대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 있다”며 “JTBC가 핵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콘텐트 창작의 자유와 제작 독립성”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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