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냉전’이란 미국 뉴욕의 외교협의회 선임연구원이었던 샤피컬 이슬람이 92년 봄 내놓은 말이었다. 이때는 냉전체제가 붕괴된 직후였다.

그는 미·소 양극체제에 의한 동·서 냉전이 끝난 뒤 자본주의국가끼리의 냉전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본주의 냉전은 미국·유럽·일본의 3각대결이 될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로부터 6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이슬람이 말한 ‘자본주의 냉전’이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바로 우리 자신이 새로운 냉전의 첫 패배자가 됐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슬람은 미국·유럽·일본의 3각 대결에서 첫 패배자는 미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지금 우리는 하필이면 한국이 첫 패배자가 됐다는 날벼락같은 현실앞에서 땅을 치고 통곡할 수 밖에 없다.

11월은 ‘세계중심 국가’를 노래했던 김영삼정부가 눈 깜짝하는 며칠 사이에 파탄의 구렁으로 굴러 떨어진 악몽의 그 달이다. 한국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곤두박질한지 만 1년 되는 그 달이다.

양입위출(量入爲出)-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한다는 뜻이다. 가난뱅이 집안살림에서 나라살림에 이르기까지 어길 수 없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421년전인 선조(宣祖) 10년(1577)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아이들을 위한 인생독본인 ‘격몽요결(擊夢要訣)’을 썼다. 조선 중기 이후 아이들은 ‘하늘 천 따 지’를 익히듯 이 ‘격몽요결’을 읽었다.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씀씀이를 절제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런 것을 금하며 항상 저축이 조금씩이라도 있도록 예비”해야 한다고.

그것은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라는 말보다도 더 상식적인 얘기다. 그것을 저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지금 우리의 몰골이 바로 그 대답이 된다.

빚더미위에 모래성을 쌓아 놓고 거드름피우고, 중복투자에 과잉투자를 일삼고, 비자금을 이리저리 빼돌려 부정·부패의 나눠먹기로 배를 채우고, 빚얻어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던 얼빠진 사람들. 그것이 불과 1년전 우리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해서 ‘반만년 역사’를 자랑해온 민족답지않게 우리는 국가경영능력이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세계앞에 공개노출했다. 왜 그렇게 됐는가?

그동안 이 나라에는 공익을 대표하는 공인(公人)집단과 공복(公僕)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정치권력과 금권의 호령에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군단(軍團)’이 소위 사회지도층 행세를 해왔다.

이들은 인맥과 금맥에 등록된 직업적 명사(名士)로 공직과 비자금과 이권과 부동산투기의 먹이사슬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려왔다.

이들은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지금도 ‘직업적 명사’로서 기득권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여전히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경영의 파수꾼이어야할 언론이 이 집단에 끼어들지 않았던들 오늘의 파탄을 자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론이 해바라기군단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것은 유신정권때도 전두환천하때도 아닌 김영삼정부시절이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아이러니였다.

정치권력 그리고 재벌과 삼위일체가 돼서 지배집단의 영광을 누렸던 언론에게는 비판도 없고, ‘소수의 목소리’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언론에는 비판이나 소수의 소리가 없다.

과거 ‘세계화’를 합창했던 것처럼 지금 언론은 ‘외자도입’과 기업의 해외매각을 합창하고 있다.
재벌은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정부는 상호 빚보증해소나 합병·업종교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소유와 경영의 구조적 개혁없이 재벌개혁은 없다.

전문경영인체제로 투명한 책임경영을 제도화하고, 소유를 분산해서 자본주의 기업답게 공중(公衆)의 소유로 만드는 것이 ‘개혁’이다. 그러나 언론은 재벌의 본질적 개혁에는 눈을 감고 있다. 정리해고를 감내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재벌 오너들의 고통분담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의 합창도 요란하다. 언론은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거대 재벌과 스탈린주의의 악수를 과대포장하고, 일방적으로 미화하고 있다.

금쪽같은 달러를 뿌리면서 금강산에 오르는 것만이 포용정책인가? 금강산이라는 ‘고립된 섬’에 가는 것이 ‘고향방문’인가? 포용정책의 첫단추가 잘못 선택되지는 않았는가? 이런 의문은 반드시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김영삼정부의 몰락은 언론이 기본적 직무인 비판과 견제를 포기했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었다. 언론의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김영삼정부 안락사였다. 이 해바라기군단 사회에서 언론은 미련을 떨쳐버리고 공익을 대표하는 매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만이 ‘정치적 몰락’의 연속극을 막는 길이다. 또 자본주의 냉전시대에 살아남고, 97년 11월의 치욕을 하나의 교훈으로 역사에 기록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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