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잔상

학위 과정을 마친 뒤 서울의 한 대학에 자리 잡았다. 객원연구원이란 타이틀로 MBC에도 적을 두었다. 운이 좋았다. 뜻하지 않은 피해를 끼친 적이 있다. 2001년 1월 MBC 기획국 명의로 연구보고서를 작성했는데 대외비로 분류된 걸 모르고 한 언론사 기자에게 분석결과를 발설한 것이다. 두 달 뒤 정책기획실장은 춘천MBC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관리 책임 소홀에 따른 문책성 조치란 얘기가 파다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실장보다 사장이 높은 지위인데 꼭 그런 건 아니구나, 게다가 징계를 사유로 인사 조치하는 곳이 지역계열사 사장이구나란 사실을. 그는 이후 본사로 영전했다.

# 관계자 징계

충북MBC 라디오는 2019년 4월, 뉴스를 전하며 날씨 정보를 제외한 6개 아이템을 전날 방송한 내용 그대로 송출했다. 6개월 뒤 춘천MBC 라디오에서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정오뉴스를 방송하면서 날씨 이외의 리포트 모두를 전날 방송분으로 채운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해가 바뀌어도 그치지 않았다. 2020년 9월, 대전MBC 라디오가 ‘15시 뉴스’를 방송하면서 날씨를 뺀 나머지 꼭지를 3일 전 내용으로 내보낸 것이다. 뉴스를 재탕한 3개사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차례로 중징계에 해당하는 ‘관계자 징계’ 조치를 받았다. 이쯤 되면 돌출적 사고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어렵다. 지역MBC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체념문화

방송은 제작에서 송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시스템화 되어 있다. 시스템이 오작동하면 음성 없이 영상만 나가거나 정지 또는 암전된 상태로 방송되는 사고가 발생할 개연성이 상존한다. 시스템을 구비했다고 손 놓고 있을 일이 아니다. MBC 지역계열사의 잇단 사고가 시스템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려되는 지점은 방송사 내부의 조직문화다. 양질의 프로그램 제작은 고사하고 방송 사고에 준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행여 조직 내부의 ‘체념문화’에서 기인한 결과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는다. 일찍이 호남대 한선 교수는 지역방송 프로그램 생산을 제약하는 요소로 체념문화를 비롯한 소통·경쟁·인력양성 부재 문화 등을 꼽은 바 있다. 시스템이란 것도 결국 방송사 구성원들의 고된 협업 과정을 거친 손끝에서 이루어짐을 상기할 때 조직문화와 동떨어진 문제도 아닐성싶다. 지금 지역MBC, 나아가 지역방송은 시스템과 조직문화를 지탱하는 토대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

# 내부 식민지

지역MBC는 대주주인 서울MBC와 계열사 관계에 있다. 이 체제의 장점은 인사와 경영, 편성이 본사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있다. 경영 자율성에 기초해 지역사 사정에 입각한 조직 운영과 지역사회의 수요에 기반을 둔 프로그램 제작이 가능하다. 계열사가 누릴 수 있는 최대 장점인 유연성은 서울MBC가 본사의 필요를 우선순위에 두는 순간 물거품이 된다. 실제 지역MBC는 자사 출신이 사장으로 승진하기보다 본사 출신이 낙하산처럼 내려와 사장 자리를 꿰차는 관행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리곤 했다. 본사의 일방적 사장 선임과 계열사 지침 등으로 지역MBC의 자율성이 고갈된다는 진단이 꽤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지역MBC 사장 자리는 서울MBC의 인사 적체 해소 통로로 오용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때는 지역사를 통제하는 고리로 지역MBC 사장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자율·책임 경영은 고사하고 지역계열사의 본사 종속성만 확장·심화하는 꼴이다. 지역사 사장 선임을 매개로 한 MBC의 지배구조는 그래서 ‘내부 식민지’에 비유되곤 한다.

▲ 서울 상암동 MBC 사옥. ⓒ 연합뉴스
▲ 서울 상암동 MBC 사옥. ⓒ 연합뉴스

# 지역계열사 사장

구습이 꼭 악습은 아니다. 사장 한 명 바뀐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지 속단할 수 없다. 계열사 체제에서 본사 출신이 더 큰 성과를 낼 수도 있을 터이다. MBC가 노사 동수로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운영한 뒤 사장 후보자 면접 등을 거쳐 15개 지역계열사 차기 사장을 내정하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와 사전협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적잖은 숙의와 고민을 했으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래서 더 아쉽다. 내부 식민지적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조직문화가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지역MBC 처지에서 자사 출신 사장 선임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회피했기 때문이다. “지역사의 구성원들은 열패감에 빠져 있다”, “여전히 서울 출신 지원자가 지역사 출신보다 우월하다는 선입견은 견고하다”, “구성원들의 간절함은 본사 경영진의 선입견을 넘어서지 못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가 지역MBC 차기 사장 내정 직후 발표한 논평에 담긴 실망감,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박탈감과 모멸감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 미완의 적폐청산

사실 MBC를 포함한 지상파방송 3사 모두 키스테이션 구실을 하는 본사의 낙하산 인사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역방송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체념적 또는 방관적 태도가 만연한지 오래다. 촛불혁명을 거쳐 새 정부가 출범하고 공영방송 정상화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2017년 9월, KBS와 MBC가 언론적폐 청산과 총체적 개혁을 내걸고 장기간 동시 파업을 벌이면서 비로소 지역방송 사장 선임 관행도 청산 대상의 하나로 떠올랐다. 2018년 당시 한껏 고조된 기대치 탓인지 약간의 진일보에도 아쉬움은 감추기 힘들었다. 당시 서울MBC 사장이 지역계열사와의 수직적 구조 타파를 공언했기에 실망감은 더했다. 2021년에라도 촛불혁명의 나머지 한 자락을 완성하길 바랐으나 견고한 관성의 법칙을 재확인할 뿐이다.

# 자기결정권

며칠 전 국민의당 서울시당위원장이 구설수에 올랐다. 경주 월성 원자력발전소의 삼중수소 다량 누출을 보도한 포항MBC를 두고 “어디 지방방송 얘기 갖고”라고 비하해서다. 당사자는 ‘실언’이라 사과했다지만 나에겐 ‘속마음’으로 읽혔다. 이 모든 게 지역사 사장 선임 관행 탓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 무관한 해프닝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공당의 공인이 공적 자리에서 대놓고 지역 보도를 하찮게 여긴 건 식민화되어 존재감마저 사라진 지역방송의 현주소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자사 출신 사장이 능사는 아니다. 하지만 물꼬는 틀 수 있다. 비용도 들지 않고 사회적 논란도 일으키지 않는다. 아니, 전국적으로 16개 지역계열사를 거느린 서울MBC의 주가가 올라갈 일이다. 만시지탄이다. 3년 뒤를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 가지 지금부터라도 행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지역계열사의 자율성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자기 결정권이 없다는 건 식민통치의 가장 큰 특징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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