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크리트 말인 ‘칼라’는 순간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영원의 뜻을 갖는다. 희한하다면 희한한 말이다. 그러나 새겨보면 새겨볼수록 시간의 정체를 그만큼 적절하게 드러내는 말도 없을 듯하다. 그렇다. 시간 자체에 무슨 마디가 있는가. 순간이라고 인식되는 시간의 마디들은 모두 영원에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새해도 그러하고 세기의 바뀜도 그러하다. 시간을 살아가는 문명의 인간들이, 달을 정하고 해를 정해놓고 시간에도 마디가 있는듯이 믿고자 한다. 구태여 말한다면 의도적인 착각의 신념화이다. 그러나 그 의도의 노림수는 착각을 뒤덮고도 남을만큼 무겁다. 마디마디의 새로움, 새로운 삶을 겨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역사의 전환을 노린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터이다.

1999년의 새해를 맞으면서는 더욱 그 시간의 마디에 쏠리는 감회가 여느 때 보다도 각별하다.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든,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세기말의 막장에 들어서고 말았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세기, 아니 새로운 천년의 시간앞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새로운 삶, 새로운 문명, 새로운 전환을 노래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 새로운 문명, 새로운 전환은 시간에 마디를 새겨두었다고 해서 저절로 이어지는 것인가. 새로운 뜻이 새롭게 모아져야만 시간의 마디에 값하는 새로움은 태어난다. 물론 뜻의 결집과 창조적 상승은 뜻의 이어짐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정보화사회의 장미빛 타령을 늘어놓을 나위도 없이, 그 뜻의 이어짐을 매개하는 구실은 그 누가, 그리고 무엇이 담당해야 하는가.

불문가지의 핀잔을 무릅쓰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의도적으로 대답하고, 그 대답을 대문자로 새겨두고자 한다. 그것은 언론의 몫이다.

바른 언론, 열린 언론, 간추려 말해서 언론다운 언론의 작동없이는 어떤 새로움도 기약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땅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언론다운 언론을 가꾸어내지 못한채 그저 새로운 천년의 새로움만을 노래하기에 바쁘다.

불현듯 송두율 교수의 <21세기와의 대화>에서 읽었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언론재벌’이라는 말도 있고,, ‘재벌언론’이라는 말도 있다. 또 ‘권언유착’이라는 말도 있다.

그람시 식으로 표현한다면 ‘언론재벌’은 ‘시민사회’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시민사회’의 물질적 토대를, ‘재벌언론’은 ‘시민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이 ‘시민사회’의 가장 동적인 이데올로기를 갖게 된 셈이다.

‘권언유착’은 ‘국가’라는 ‘정치사회’가 ‘시민사회’의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할 수 있게끔 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역시 철학자의 문장은 난삽하기 마련인가. 그러나 나는 그의 난삽도 의도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다. 흘려 읽지 말고, 되새기며 읽으라는 의도적 권고가 담겨 있다고 믿고 싶다.

되새겨 읽어보면 그의 문장이야말로 한국언론이 안고 있는 병리의 핵심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어처구니 없게도 이땅의 언론은, 그들의 물질적 토대 위에서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좌지우지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추구한다. 또 이땅의 언론은 그들의 경제적 토대 위에서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독점적으로 생산해 낸다. 그 흙탕물속에 국가도 가세한다. 그것이 철학적으로 진단되는 한국언론의 병리이다.

그러나 송두율 교수는 또 하나의 병리를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이땅을 떠나 산지 너무나도 오래인 탓이리라. 그것은 ‘경언유착’의 탁류이다. ‘재벌언론’이 아니라도 이땅의 대기업들은 광고라는 미끼로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유통을 저지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만을 확대재생산하고 유통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긴 말을 늘어놓을 겨를은 없다. 한마디로 이 언론을 가지고, 우리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의 새로운 삶, 새로운 문명, 새로운 전환을 이룩해 낼 수 있는가. 또 한번 불문가지의 핀잔을 무릅쓰고 대답하고자 한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억지의 항변을 고집하지 말라. 그것은 지배의 영구화에 집착하는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 가당치 않은 언론의 병리를 과감히 다스려내야 한다. 그것도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이 열리기 전에 집도에 나서야 한다. 세기말의 막장인 1999년은 우리에게 그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을 외쳐대고 있다. 깨우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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