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은 소리’의 글자리를 어지럽혀 온 지도 어언 4년 반, 이젠 숨을 돌리고 조금은 떨어진 자리에서 이 땅의 언론판을 지켜보고 싶다. 더러는 내키지 않는 험담과 요설, 그리고 애타는 외침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아마도 입담이 모자랐던 탓이리라. 경륜과 열정 또한 함량에 미치지 못했던 탓이리라. 그야말로 ‘여전히’ 민주언론의 깃발은 허공에서 나부
바야흐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호재’가 또 한번의‘홍수 저널리즘’을 몰아오고 있다. 미디어들의 화면과 지면은 이미 기대와 책략과 쓴소리들로 채워져 간다. 물론 경청할 만한 고담준론들도 많지만, 어느덧 한국언론의 장기인 ‘가십 저널리즘’도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메뉴 저널리즘’이라고 할까. ‘식단 저널리즘’이라고나 부를까. 벌써부터 옥류관 냉면 타령과 무슨 비
거창하게 외치든 낮은 소리로 속삭이든, 2000년이란 ‘뜻깊은 해’임엔 틀림없는 듯이 보인다. 5월 16일 밤, MBC의 은 이른바 재벌의 실체를 족벌의 함수로 꿰뚫어 보인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임에도 재벌 따로, 족벌 따로인 듯 착각해온 타성의 인식에 일침을 가한다. 그뿐이 아니다. 이른바 족벌신문 또는 신문족벌을, ‘재벌=족벌’이라는 등식의 연장선상에서
오늘은 오로지 절망이 아닌 희망과, 환상이 아닌 적정한 기대만을 말하고자 한다. 그 모두를 간추려 ‘읍소‘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약칭 한국의 언론이여, 약칭 조선의 언론이여. 구태여 지난 날의 허물을 새삼 들추고, 회개와 속죄를 들먹이지는 않을 터이다. 오로지 이제는 언론다운 언론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게 어렵다면 우선 언론 비슷한 언론으로 돌아오기를
총선거의 열풍도 허망하리만큼 잠들어간다. 서슬 퍼렇던 격돌도 이젠 여소야대의 새로운 대치로 변모해간다.´국가기간´이니 ´공영´이니 자부하는 거대 방송매체들의 엉뚱하고도 방자한 선거결과 점치기 역시 한바탕 ´오발탄´ 소동쯤으로 묻혀 가는 추세다. 그렇다고 미디어들의 ´장사거리&acut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펴낸 “16대 총선참여 각 정당의 정견 정책자료집”은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다. 물론, 충격의 요인은 두어가지쯤으로 헤아려진다. 그 하나는 선관위가 단순한 ‘자료집’을 넘어 비록 제한적이고 조심스럽게나마 각 정당의 정책공약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실현가능성보다는 ‘전시적’ 성향이 짙은 공약들이 많아보인다는 지적
왜 우리는, 특히 우리의 언론은 ‘새삼스러움’과 ‘만시지탄’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까. 스위스의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포럼(WEF)의 ‘토막중계’에 접하면서 또 다시 우러나는 감회이다.이른바 다보스 포럼은 오로지 무지개 빛으로만 그려졌던 세계화에 맹공의 목소리들을 울려댄다. 물론 그 목소리들의 주인공 가운데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맹장
이른바 정치판의 ‘정책대결’이나 이른바 언론판의 ‘의제설정’기능은, 이땅의 겨레가 봄날보다도 더욱 애타게 기다리는 화사한 미래의 풍경이다. 해마다 봄날은 열려도 정책다운 정책의 맞부딪침이나, 의제다운 의제의 떠오름은 열려오지 않는 탓이다. 온 나라를 뒤흔드는 이번 총선판에서도 그 화사한 미래의 풍경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로 확인될 뿐이다.요즘들어 화면
비록 자칭에 지나지 않을망정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에 이르렀다는데도, 또 다시 유언비어가 판을 친다. ‘성역’도 보이지 않는다. ‘성시’(聖時)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숨 쉴 틈도 없어보인다. 그 유언과 비어의 격전장엔 도대체‘성인’이란 존재할 수 없다. 공간과 시간과 인간을 가리지 않은채 무차별의 난타전이 나라와 겨레를 멍들게 한다. 역시
언론은 트러블 메이커인가, 교통 정리의 신호등인가. 요즘 들어 새삼스럽게 그따위 ‘원초적 물음’이 온 몸과 온 얼을 사로잡는다. ‘공천’인지 ‘사천’인지 종잡을 수 없는 정치놀음으로 세상이 어지럽고, 그 뒤만을 쫓아가는 언론의 수작들 또한 어지럽기 짝이 없다. 총선 철이 되면 의례 통과제의처럼 겪었던 계절병인 신당타령도 예외없이 끼어들어 두 권력의 어지러움
불현듯 '시빅 저널리즘' 또는 '퍼블릭 저널리즘'이라는 남의 나라 말이 떠오른다. 이 땅과는 대조적인 남의 나라 '언론현상' 또는 '언론기류'가 빛과 그림자로 얼룩지는 탓이다. 1990년대 이래 미국의 지방신문들은 시민참여를 넓히는 새로운 실험을 진행중이다. 그 현상 그 기류를 '시빅'또는 '퍼블릭'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모양이다.이를테면 노스캐롤라이나
새 천년 새 세기의 진군나팔소리가 요란하다. 거의 온 누리를 압도하는 기세다. 뭇 사람들을 최면하는 위력 또한 놀랍다. 아직은 새 천년 새 세기의 시작이 1년 더 남았다는 이들의 깐깐한 목소리는 메아리를 남기지 못한 채 묻혀간다. 그리고 모두가 꿈과 희망의 합창에 끼어들고자 들뜬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꿈과 희망에 목마르다는 반증일 터이다. 어쩌
이땅의 거대언론들만을 뒤따라가다 보면 이미 지나가버린 얘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기구(WTO)의 시애틀회의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중요 의제일뿐더러 미래에도 이어져갈 중요 의제이기 때문이다. ´뉴라운드´건 ´밀레니엄라운드´건, 또는 ´토끼라운드´건, 그 이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다. 버릴 수가 없다. 오히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이 피어나는 것임을 믿고 싶다.“백척간두 진일보?!”‘네가 기자냐’ ‘매춘 언론’ ‘윤락기자’ 따위로 이어지는 돌팔매들을 보면서, 나는 요즘 남모르게 그 한마디를 거듭 외워댄다. ‘백척간두 진일보’란 물론 불가에 전승되는 ‘게’의 하나이다. 그러나 속인일 수밖에 없는
"이미 신문은 편집인과 기자의 손을 떠났다." 신문편집인 협회장이었던 최석채 선생이 비통한 선언을 남긴지도 어언 36년이 넘어간다. 일제의 식민지 시대보다도 더 긴 시간이 흘러온 셈이다. 편집인과 기자의 손을 떠난 신문은 누구의 것이 되었는가. 물을 나위도 없이 발행인의 것이 되었다. 이른바 오너 사주의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미 고인
"어리석음, 과오, 죄악, 탐욕이/우리 정신을 차지하고 육신을 괴롭히며,/또한 거지들이 몸에서 이·벼룩을 기르듯이, /우리의 알뜰한 회한을 키우도다/우리 죄악들 끈질기고 참회는 무른고야." ´악마의 시인´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보들레르가 남긴 ´악의 꽃´의 첫머리는 그렇게 울먹인다."민주주의는 늘 ´강간´을 당하는 언어이다."일찍이 강준만 교수가 펴낸 ´한국언
바로 의 이 글자리에 "메타노이아를 찾아서"를 외쳐댄지도 이미 3년반 저쪽의 일이다. 이땅에는 뒤늦게나마라도 깨닫고 회개하는 메타노이아의 문화가 자라나지 않는다. 헌정을 파괴하고 양민을 학살한 군부독재의 우두머리들마저 면죄부만을 요구한다. 더구나 그 문화를 가꾸어내야 할 언론 또한 끝내 스스로의 잘못을 스스로 드러내어 회개하지 않는다….
"우리도 세상의 주인이다"-지난 8월 29일에 치러진 진보정당 발기인대회는, 그 한마디를 압축된 외침으로 내걸었다. 얼핏 보면 비단 진보정당만이 아니라, 국민 누구나가 당연히 외칠수 있고 또한 당연히 외쳐야 하는 한마디인것도 같다. 그러나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처럼 이 풍진세상을 무던히도 살아온 나같은 무리에겐, 그들이 외치는 "우리도"의 그 ´도´라는 보조
혹독하리만큼 무더운 나날이다. 이건 폭염을 넘어서는 ´혹염´이 아닌가. 냉방차나 냉방실의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은, 아스팔트를 녹이는 불볕 햇살도 그저 서늘한 풍경쯤으로 여겨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바깥 세상은 한없이 달아오르고, 거리의 사람들은 지치다 못해 짜증의 수렁으로 떨어져간다.역시 인간이란 하늘과 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의연금이라고도 하고 성금이라고도 일컫는다. 어느쪽이건 좋은 말이며 좋은 뜻이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한동안 나라에 재앙이 일때마다 왜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의연금이나 성금을 거두어야 하는가를 회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그 회의의 뒤안엔 선진국 타령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회적 안전망 또는 위험에 맞서는 국가적 대응의 미비라는 한탄이 깔려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