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사상시비 파문’이 일단락됐다.
사상시비의 주역인 조선일보가 18일자에 ‘특별기고’ 형식으로 최장집 교수의 반론문을 게재하고, 월간조선이 2월호에 최교수의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사상시비 파문이 형식적으로나마 일단락되게 된 것이다.

최교수는 반론문에서 이번의 ‘사상시비 파문’을 “과거에 집착하는 특정 관념이 이(탈냉전시대)에 적응치 못함으로써 야기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최교수는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와 행동 속에 과거 현대사의 냉전적 갈등과 이념대립이 반영되어 있지 않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면서 청산돼야 할 ‘구태’의 구체적 모습으로 이데올로기적 비판, 흑백논리, 토론문화의 부재 등을 꼽았다.

우리가 이번의 ‘사상시비파문’의 일단락에 주목하는 이유는 최교수가 규정한 사건의 성격에 동의하기 때문이며, 그 사건의 해결이 갖는 사회적 함의가 적지 않다는 데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월간조선이 11월호에서 처음으로 최교수의 사상을 문제삼는 기사를 실었을 때 수많은 언론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있을 수 없는 사상검열’이라고 비판했었다.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냉전이데올로기로, 그것도 논문의 본내용을 일정하게 왜곡하면서 사상을 검열하는 것은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언론의 본령에서도 어긋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지적은 재판부가 최교수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사실상 ‘공증’을 받게 됐고 결국 반론문 게재라는 형식으로 ‘정당성’을 관철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이같은 결과는 한 교수가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다는 차원을 넘어 사회 전체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오만한 언론권력의 횡포가 시민사회영역의 적극적인 저항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과거 50년간 분단체제와 냉전이데올로기에 기승해 사회를 지배해왔던 냉전세력의 쇠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다양한 가치관과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들을 흑과 백의 이분법적 구도로 나눠놓고 대척점에 서있는 이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사회에서 격리시켜왔던 부끄러운 과거사, 그리고 이같은 냉전적 대결구도를 질타하고 깨트리기는커녕 ‘선봉대’임을 자처하며 ‘용공몰이’에 앞장섰던 일부 언론의 빗나간 궤적이 비로소 일신될 수 있는 계기를 이번 사건을 통해 확보하게 된 것이다.

과거처럼 일부 냉전세력과 수구언론의 ‘선동’에 국민들이 휘둘렸다면 반론문 게재라는 ‘조그만 승리’는 일구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 냉전세력과 이에 기승한 ‘이념언론’의 궤변에 항거하는 언론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없었다면 ‘조그만 승리’는 또한 요원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사태해결은 냉전세력의 쇠퇴임과 동시에 탈냉전시대의 새로운 주체세력의 등장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해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평균적 사고체계를 넘어서는 주장이 나올라치면, 더군다나 그것이 남북관계 또는 이념문제와 관계된 것이라면 여지없이 ‘비난’의 칼날을 들이대는 풍토는 아직껏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한가운데에 언론이 자리잡고 있다. 한 정권의 정책방향 차원을 떠나 시대적이고 민족적인 ‘정도’로 평가되던 이른바 ‘햇볕론’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흔든 게 바로 언론이며, 수많은 북한 동포가 기아에 허덕이는데도 남북대결의식의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동포돕기운동’에 제동을 걸었던 게 바로 언론이었다. 남북을 오가는 뱃길이 열렸음에도 치열한 냉전은 언론계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언론계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최교수 사상시비 파문’의 해결과정이 갖는 상징성을 더욱 극명하게 한다.

자성과 정정에 인색한 언론에게 ‘규탄’과 ‘대응’이 뒤따르는 역동성의 시대가 열렸음을 ‘최장집 사상시비 파문’의 종결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50년을 이어온 ‘냉전언론’에 비로소 균열이 오고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