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검사는 법을 대표하고 공익을 대표하는 집행관이다.
그렇지만 사법관료로서 일정한 경력을 쌓은 다음에는 돈을 받는 변호사로 개업한다.

마치 빌딩의 회전문(廻轉門)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이들은 법조계라는 울타리안의 성역(聖域)을 돌고 도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판·검사라는 사법관료 경력은 변호사 개업의 예비코스와도 같다.

이 법조 회전문을 돌게 하는 기름이 ‘전관예우’의 탈법적 특권이다.
1년전 의정부에서 법조비리가 터지더니 이번에는 대전에서 법조비리가 터졌다. 이번 대전 법조비리는 부장 검사 출신 이종기 변호사의 ‘사건 수임(受任) 비리’가 발단이다. 그 결말도 수임비리 테두리를 벗어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같다.

수사과정에서 이종기변호사로부터 술대접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판·검사가 5~6명, 돈을 받은 혐의가 드러난 판·검사가 30여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검찰당국은 “소액의 금품을 받은 경우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처벌기준을 크게 벗어나 처벌할 수는 없다”고 했다.

변호사의 수임비리는 수사에서 기소·공판·판결에 이르기까지 사법절차자체의 비리-쉽게 말해서 ‘공판의 비리’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된다. 브로커들에게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해도 전관예우라는 공판과정상 탈법적 특혜가 없다면, 특정변호사에게 사건 의뢰자들이 그처럼 몰려들 까닭이 없다.

결국 이종기변호사의 수임비리는 ‘깃털’에 불과하고, 몸통은 ‘공판비리’라고 해야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전관예우의 탈법적 먹이사슬이 문제된 지는 오래다. 그래서 한때 판·검사들이 퇴임때 임지에서는 변호사개업을 못하도록 제한했었다. 헌법재판소가 그것을 ‘위헌’이라 결정해서 ‘법조회전문의 천국’이 계속돼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의하면 이 ‘위헌’결정은 “법조결정 15년 미만의 경우만 개업지제한을 해서 헌법상 평등권 위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이번에도 “변호사 개업지제한은 위헌소지가 있다”고 반대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법원은 뇌물과 떡값을 가리지 않고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한 선례가 있다. 액수나 댓가성에 관계없이 법을 집행하는 판·검사에게 돈이 갔다면 당연히 포괄적 뇌물로 봐야 할 것이다.
사법관료의 경우 판단기준은 여느 공직자보다 엄격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소액 돈봉투는 처벌하지 않은 고위공직자의 일반적 처리관례”를 인용하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영어로 법(Law)은 바로 정의(Justice)와 동의어(同義語)다. 이 나라에서도 적지않은 사법관료와 개업 변호사들이 법과 정의를 위해 봉사해야한다는 본연의 사명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사법고시제도는 법조문만 달달달 외는 ‘법률기술자’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기술자들이 법을 지배하는 한 법조비리는 의정부·대전에 국한된 일도 아니고, 수임비리처벌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필자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나라의 사법제도는 감시와 비판이 없이 성역에 군림하고 있다(98년 3월 11일자 ‘법정의 판결과 언론의 검증’ 제하의 본란. 제작과정의 착오로 ‘고급언론 실종’이라는 제목이 잘못 들어갔음).

미국에서처럼 배심제도를 통해 시민의 양식이 재판에 참여하도록 하지는 못한다해도, 언론이 입을 열어 공판과정과 판결을 엄격하게 검증·비판함으로써 공판을 밀실에서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법조비리가 두차례에 걸쳐 터졌는데도 법조 회전문의 철옹성을 깨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절대군주의 부탁도 무시했던 2백여년전의 한 ‘명판결’을 뒤돌아 보자.

정조(正祖·재위 1777~1800년)때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 권엄이 명판결의 주인공이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어의(御醫) 강명길이 부모를 이장(移葬)하기 위해 서대문밖에 산을 샀다고 한다. 산밑의 민가 수십채도 샀다. 그러나 흉년이 들어 민가에 들어있는 사람들은 10월 추수가 끝난 뒤에도 집을 비워주지못했다.

강명길은 민가를 몰아내게 해달라고 한성부에 소장을 냈지만, 판윤 권엄은 들어주지 않았다. 강명길이 임금에게 아뢰어 정조는 승지를 권엄에게 보냈다. “민가를 몰아내게 하라”는 부탁이었다.

강명길이 안심하고 또 소장을 냈지만 판윤 권엄은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정조가 크게 노해서 승지를 다시 보냈을 때 권엄은 말했다. “주리고 추위에 떠는 백성을 몰아 내면 모두 길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죄를 지을지언정 백성이 나라를 원망하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권엄이 화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정조는 며칠뒤에 말했다한다. “생각해 보니 판윤의 처사가 참으로 옳다. 권판윤은 얻기 어려운 인재다.”

재판을 성역으로 모시는 언론은 사법제도를 그처럼 엄격한 제도로 다시 세울 책임이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지않는 사법제도를 만들 책임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