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불식여산진면목, 지연신재차산중.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북송시대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지은 <제서림벽題西林壁>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시진핑이 <파탈빈곤擺脫貧困·민동지광閩東之光-閩東文化建設隨想> 등의 글에서 이 명구를 인용했다. 소동파의 ‘여산 진면목’운운의 시는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등지에서도 널리 인구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질박한 시지만 깊고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보는 사람의 눈이 다르고, 서로 다른 장소와 각도에 따라 여러 형태로 보인다. 소동파는 이 시를 통해 자신의 눈높이에 따라 달리 보이는 여산의 모습에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인식의 차이를 일깨우고 있다. 동파는 이런 인식의 격차를 ‘앞에서 보면 마루 같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로다. 멀고 가까운 데서 높고 낮은 데서 보는 모습이 서로 다르구나(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라는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식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동파는 여산의 본모습을 보려면 여산을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여산을 보는 ‘자신의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只緣身在此山中) 여산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산을 벗어나 더 많은 감성으로 관찰하고, 더 냉철한 이성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 시는 현실세계의 어떤 현상을 파악할 때 자신의 주관적 잣대에 따라 자신이 본 일면만을 전체인양 주장해서는 복잡한 사물의 본질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진핑은 1990년 ‘푸젠성 동부지역 문화(민동문화閩東文化)’ 건설을 언급하며 이 시를 인용했다. 그는 “푸젠성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거주한다고 해서 꼭 해당 지역을 잘 알고, 고향의 자랑할 만한 곳을 두루 알고 있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을 모르고)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줄만 안다면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이럴 때는 ‘당사자가 알지 못하는’ 심리상태를 타파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다. 자신의 눈높이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더욱 넓은 시야로 푸젠 동부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특색과 우수한 점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과학적 인식론으로, 단지 푸젠성 동부지역 사람들의 예를 들었을 뿐 모두에게 해당하는 인식적 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 루산 (廬山 여산). 사진=중국 루산 관광 사이트
▲ 루산 (廬山 여산). 사진=중국 루산 관광 사이트

 

소식은 원풍元豊 7년(1084년)에 좌천당해 황저우(黃州)에서 루저우(汝州)로 가는 길에 장시성(江西省)의 주장(九江)을 지날 때 루산(廬山; 여산)을 유람했다. 여산의 매우 아름다운 산수가 시인의 시흥을 불러일으켰다. 소식은 이때 여산에 관한 시를 여러 편 지었는데 <제서림벽>은 그중 한 편이다. 원전은 다음과 같다.

橫看成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앞에서 보면 마루 같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로다. 멀고 가까운 데서 높고 낮은 데서 보는 모습이 서로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몸이 산속에 있기 때문일세.

이 시는 여산의 모습을 질박하게 묘사하면서도 뜻이 깊고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담았다. 동파는 여산을 유람한 체험을 추상적으로 논하지 않고 정확하게 파악해 철리哲理적 내용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시의 첫머리 두 구절인 ‘횡간橫看~, 원근遠近~’ 부분은 유산遊山 소견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해발 1500~1600미터에 이르는 여산은 종횡으로 교차하며 기복이 심한 산이 겹겹이 이어지는 큰 산이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가 운무에 휩싸여 천태만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파는 자신이 바라보는 곳에 따라 모양이 다른 천변만화千變萬化의 여산을 그렸다. 뒤의 두 구절 ‘불식不識~, 지연只緣~’은 여산 풍광을 철리적으로 해석하는 유산체험을 설명한다.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던 까닭은 몸이 산봉우리가 연면히 이어지는 산속에 있어 시야가 기복이 심한 봉우리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경치는 필연적으로 여산의 일부분 일 수밖에 없다. 

세상일의 관찰도 유산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서로 같은 사물에 대한 인식과 문제풀이를 할 때 접근하는 이해나 견해는 항용 주관적 한계의 원인을 피할 수 없어 편면성을 벗어날 수 없다. 나무만 보면 숲을 볼 수 없고, 숲만 보면 나무를 볼 수 없는 이치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전면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갖고 반드시 전체적 사유와 의식, 그리고 대국적 관점으로 살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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