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문시장은 레거시 미디어의 불가사의다. 세계 10대 종이신문 가운데 일본 신문이 4개나 들어 있다. 요미우리와 아사히 신문은 전 세계이 1, 2위를 달리고, 마이니치와 니케이신문도 10위 안에 있다. 지금은 조금 줄었지만 요미우리는 800만부를, 아사히는 600만부 이상을 찍는다. 

엄청난 인쇄부수보다 더 놀라운 건 신문사 수입구조다. 구독료를 원천으로 하는 판매 수입이 광고보다 훨씬 많다. 2016년 일본신문협회의 조사결과 판매수입은 전체 수입의 57.3%였고, 광고수입은 21.5%에 불과했다. 광고보다 판매 수입이 많으면 거대 광고주인 기업에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는 부가 이익이 하나 더 따라온다. 그만큼 독자만 보고 달릴 수 있다. 광고가 전체 수입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신문시장과 비교하면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일본 국민들은 뉴스에 기꺼이 요금을 지불한다. 우리는 포털을 통해 뉴스를 소비하지만 신문 그 자체에 돈을 내진 않는다. 우리도 2000년대 초반까지 인터넷 페이지뷰 1, 2위를 신문사가 차지했다. 당시 포털은 메일 주고 받는 용도에 불과했다. 지금 우리 신문은 그 화려했던 영광은 뒤로한 채 포털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다. 

▲ 한 남자가 일본 도쿄 전철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Getty Images
▲ 한 남자가 일본 도쿄 전철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Getty Images

 

오마이재팬이 몇 년도 못 버틸 만큼 온라인 의견 표현에서 불모지인 일본 특유의 국민성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 아무리 익명이 보장되는 온라인 공간이라도 남의 입장에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은 여전히 강고하다. 그렇다고 일본인이 아무 생각이 없는 건 결코 아니다. 

일본이 신문 강국인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지역성’이 그것이다. 사실 ‘지역성’은 전 세계 레거시 미디어의 최대 강점이다. 

뉴욕타임스는 아직도 ‘뉴욕’이란 지명을 버리지 않고 있고, 영국의 가디언도 그 출발지인 맨체스터라는 지명을 오랫동안 달고 살았다. 가디언은 꽤 오랫동안 맨체스터 본사와 런던 본사 이원체계를 유지했다. 일본 신문도 마찬가지다. 오사카에서 출발한 아사히는 아직도 오사카와 도쿄 등 4개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서울판과 영남, 호남판 지면을 제작하지만 날마다 28~40면씩 나오는 서울판에서 딱 1면만 그 지역 특성에 맞는 지면을 배당할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다르다. 각 지역판마다 지면의 40%가량을 다르게 편집한다. 특정 주제를 놓고서 한 신문에서 각 지역판마다 논조가 다른 경우도 종종 있다. 같은 기사가 지역판마다 기사 비중을 달리하기도 한다. 가령 아사히신문이 2017년 2월 사학재단 모리토모 학원 비리 스캔들을 특종 보도했을 때 오사카판에선 사회면 톱기사로, 도쿄판에선 사회면 사이드로 배치했다. 모리토모 학원이 오사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그만큼 충실하게 반영하겠다는 취지다. 

▲ 지난 7월22일 방송된 ‘김의성 주진우 스트레이트 57회-추적 아베에 화답하는 조선일보와 친일세력’ 영상 갈무리. 사진=스트레이트 유튜브
▲ 지난 7월22일 방송된 ‘김의성 주진우 스트레이트 57회-추적 아베에 화답하는 조선일보와 친일세력’ 영상 갈무리. 사진=스트레이트 유튜브

그런 만큼 이번 조선일보의 일본어판 기사 제목 수정이 그 자체만으론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제목 수정이 기사 본문을 뛰어넘을 수 없고, 지역성을 얼마나 담아냈느냐다. 본문을 뛰어넘는 제목을 달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지역성을 형편없이 왜곡시킨 건 분명하다. 조선일보는 일본어판에 일본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담아 지역성을 구현했다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님비일 뿐이다. 일본 국민을 위해서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이것이 일본 국민을 위한 길이었다. 

일본 극우세력과 같은 시선으로 제목달아 보도한다면 일본은 천년이 가도 독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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