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이기려고 '국민사찰법' 허용, 더민주의 딜레마
선거 이기려고 '국민사찰법' 허용, 더민주의 딜레마
[아침신문 솎아보기] "민주주의 희망을 봤다" 9일 만에 끝낸 필리버스터, "죽은 정치의 위협에 굴복" 비판도

선거 위해 포기한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뭡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그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희가 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총선에서 이기려고 그러는 겁니다. 총선에서 국민 여러분이 과반의석을 주시면 국민 여러분이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일 밤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종료를 최종 결정했다. 더민주 비대위원으로 이날 33번째 필리버스터 주자로 단상에 오른 박영선 의원은 “국민들의 마음 속 노여움을 내가 다 안고 가겠다, 나에게 분노의 화살을 쏘라”며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2일자 경향신문 3면
더불어민주당은 1일 저녁 의원총회를 열어 필리버스터를 끝내기로 최종 결론을 냈다. 이언주 더민주 원내 대변인은 이날 의총 결과 브리핑에서 “4·13 국회의원 총선거 승리를 위해 무제한 토론을 종료하기로 결정했다”며 “하지만 더민주와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의 예정된 필리버스터는 2일까지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를 끝으로 종료된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종인 비대위 대표는 의총에서 “총선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동안 필리버스터를 지지해준 분들께 감사하지만 지지자들만으로 선거를 치를 순 없다”며 필리버스터 중단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 전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민주의 해명이지만,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국민사찰법’이 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들의 ‘민의’를 선거를 위해 포기한 것에 따른 후폭풍도 커질 전망이다. 

김용익 더민주 의원은 “빵점짜리 출구전략이다. 필리버스터로 얻은 지지, 감동, 점수 다 까먹는다. 제발 정치 제대로 하라”며 지도부를 강력 성토했다. 

정의당은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이 조금도 수정되지 않고 양당 합의로 통과되면 안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참여연대·민주주의법학연구회 등 시민사회단체는 ‘죽은 정치의 위협에 진짜 정치를 포기하지 말라’는 성명서를 내고 “더민주는 정권과 국가정보원의 공포와 겁박에 굴복해 야당 역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는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세세히 알리는 데 성공했지만, 야당 의원들이 입이 닳도록 지적한 문제점, 즉 국정원이 ‘테러위험인물’을 자의적으로 선정해 감청·금융거래 정보를 수집할 가능성은 현실화됐다”며  “국정원이 당장 테러방지법을 동원해 권한을 남용하진 않을지 몰라도 1~2년쯤 지나면 그 폐해가 드러날 것”이라는 홍익표 더민주 의원의 우려를 전했다. 

2일자 동일보 3면
조선일보, 테러방지법 반대가 ‘운동권 구태’?
“국정원 감청 철저히 제한” 주장할 땐 언제고…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에 대한 평가는 신문들 사설에서도 달랐다. 필리버스터의 성과와 한계를 모두 짚어준 신문들이 있는가 하면 ‘운동권 구태’(조선일보), ‘총선버스터’(동아일보), ‘비효율적인 정쟁 국회’(서울신문) 라는 등 인권침해 우려가 큰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의미를 일방적으로 깎아내리는 신문도 있었다. 

특히 조선일보는 “더민주는 중대한 국가 현안을 이렇게 희롱하는 모습을 다수 국민이 어떻게 쳐다보는지에 대해선 무감각한 것 같다”면서 “이런 것이 바로 운동권 체질이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새 지도부가 와서 운동권 습성에서 벗어나겠다고 했지만 막상 일이 벌어지자 운동권 구태가 그대로 재연됐다”고 폄하했다.

2일자 조선일보 사설
국정원의 무불별한 사찰 권한 강화로 국민 인권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국가 현안 희롱’이라고 규정하며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민의를 대변하는 행위를 ‘운동권 구태’라고 비난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국정원이 과거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렇다고 테러 방지를 정보기관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테러 방지를 포기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는 곧 테러 방지를 명목으로 국민을 사찰하고 정치에 개입하는 국정원의 무소불위의 권한 오남용에 대한 제재를 포기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아일보는 “필리버스터를 주도한 더민주 이종걸 원내대표는 총선 역풍을 우려한 김종인 대표의 만류에 따라 어제 오전 중단을 발표하려 했지만 당내 강경파 의원의 반발과 참여연대 등 46개의 이른바 진보좌파 단체들의 반대성명으로 온종일 오락가락했다”며 “더민주의 지지층인 ‘집토끼’를 결집시키는 효과를 얻었을지 몰라도 총선 승리를 위해 공략해야 할 중도층에는 ‘안보 불감증 정당’이란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줬다”고 비판했다. 

동아는 “단상에 선 의원들은 마치 독재 시절 민주투사라도 된 듯 운동화 패션으로 발언 오래하기 신기록 경쟁까지 벌였다”며 “일부 의원은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는 총선용으로 악용해 ‘총선버스터’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테러방지법을 발의하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거듭해서 나왔다. 동아는 “테러방지법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9·11테러 이후에 추진됐으며 노무현 정부도 역점을 두었던 법안”이라며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참여연대처럼 이번에 필리버스터 중단 반대에 나선 시민단체들의 조직적 반대와 이들의 눈치를 보는 더민주당 때문에 번번이 통과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서울신문 역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지금의 법안보다 더 국가정보원에 폭넓은 수사권을 준 테러방지법을 발의했던 야당이 이제 뼈 빼고 살 뺀 ‘맹물 법안’으로 북한의 테러를 막겠다니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며 “더민주는 필리버스터라는 정치 게임에 대한 일각의 관심을 다수 국민의 지지로 착각해선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2001년 김대중 정부의 테러방지법은 당시 여야는 물론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반대하면서 처리가 무산됐다. ‘국정원이 대테러 업무를 수행토록 하겠다’고 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도 국정원 개혁이 전제된 후에 가능하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취임 이후 정치개입과 불법도청 등 오명을 뒤집어쓴 국정원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2008년 9월6일자 조선일보 사설
아울러 지난 MB정부 초기때만 해도 보수신문들의 논조는 달랐다. MB정부가 들어선 직후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논의 되자 2008년 9월6일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정원은 그간 스스로 도청, 감청과 관련해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잃는 일을 해왔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 뒤 “국정원이 남용방지장치를 마련할 테니 휴대전화 감청을 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순수하게 보일리 없다”며 국정원을 의심했다. 

이 사설에서 조선은 노무현 정부 때 논의됐던 테러방지법에 대해 “테러예방과 대응을 명분으로 민간인 사찰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불렀다”며 “국민의 도청공포가 여전한 상황에서 국정원의 감청은 철저히 제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야당과 같은 견해다.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이 국내기관의 전산자료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2007년 7월18일 사설에서 “빅브라더가 따로 없다. 국정원이 사회 곳곳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는 줄 몰랐다”면서 “마음만 먹으면 국민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를 과연 자유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다.

2일자 한겨레 사설
‘9일간의 민주주의 축제’가 남긴 과제

한편 한겨레는 1일 “절망과 불통, 그러나 성과도 남긴 필리버스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30명이 넘는 야당 의원이 무려 9일 동안 170시간이 넘는 세계 최장기 필리버스터 릴레이를 하며 사력을 다했으나, 끝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불통 스크럼’을 뚫지 못했다. ‘옳고 그름’이 ‘많고 적음’에 막혔다는 절망과 아쉬움을 느낀다”면서도 “하지만 야당 의원들은 수일간 국회 밖의 시민들과 공명하며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드러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한겨레는 “필리버스터를 통해 시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커져 국회 밖에선 장외 필리버스터가 열리고, 본회의장 방청석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며 “의원들이 시민의 대표자로서 입법 활동을 하는 과정에 시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의식도 고양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일보는 “필리버스터가 남긴 것은 ‘헌정사상 최장’ ‘세계 최장’ 등 단순한 기록만이 아니었다. 여당의 ‘자폭정치’ ‘총선용 공작’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시민들은 열광했다”며 “온라인은 온통 필리버스터 발언과 뒷얘기로 도배됐다. 본회의장은 텅 비었지만 시민들이 대신 방청석을 가득 채우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등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고 조명했다. 

김용복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정쟁이 불거질 때마다 거리로 나가던 관행을 깨고 합법 테두리 안에서 자기 의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의회정치가 한층 진일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학과 교수는 “필리버스터 방청이 급증한 것은 국회가 실제 무슨 일을 하는지 국민의 관심이 커졌다는 방증”이라며 “한국사회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공론화 과정이 부족했는데 정치권과 국민, 언론 모두 민주적 절차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이번 필리버스터가 정치권의 타협 부재의 산물이라는 지적도 피해갈 수 없었다. 김용복 교수는 “주요 사안을 놓고 대화할 시간이 그토록 많았는데 ‘오죽하면 필리버스터까지 가야 했을까’하는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라며 “필리버스터는 여야의 부족한 협상능력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2일자 한국일보 2면
국민일보는 결국 필리버스터를 ‘중도 포기’하게 됐지만 여야 모두 실보다 득이 많았다는 분석을 내놨다. 야당은 법의 독소조항을 부각시키는 데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 반면 실속은 수정·보완 없이 테러방지법을 처리할 수 있게 된 새누리당이 챙기게 됐다는 것이다. 

국민일보는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던 테러방지법의 구체적인 문제점을 상세하게 알릴 수 있었다”면서도 “그러나 필리버스터의 목적인 입법 저지뿐 아니라 일부 수정조차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블록버스터급 흥행에는 못 미쳤다”고 평가했다. 

여당에 대해선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을 끝까지 사수했다는 점이 성과로 꼽힌다. ‘필리버스터 배수진’을 친 더민주의 압박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며 “다만 야당의 거센 여론전이 총선에서 여당에 불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2일 아침 전국단위 종합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선거 위해 ‘필리버스터’ 접은 더민주>
국민일보 <민심에 밀린 ‘필리버스터’>
동아일보 <‘관피아 방지법’ 위의 관피아>
서울신문 <대북제재 표결 연기… 北 “인권회의 불참”>
세계일보 <북 제재 결의안 만장일치 채택>
조선일보 <결정하고도 끌려다닌 野 지도부> 
중앙일보 <국회 필리버스터 신기록 경제는 마이너스 신기록>
한겨레 <끝내 막힌 ‘9일간의 호소’… 국정원 ‘국민사찰’ 빗장 풀린다>
한국일보 <“총선 체제로” 필리버스터 시계 멈추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