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의 파급효과가 정치뉴스의 강고한 프레임까지 무너뜨릴 기세로 거세지고 있다. 주류 언론들은 슬그머니 ‘침묵의 카르텔’ 속으로 철수했지만, 필리버스터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는 새로운 말길과 글길을 따라 일파만파 퍼져가고 있다.

무제한 토론의 막이 오른 직후, 국회 정론관에 상주하는 규모 큰 언론사의 정치부 기자들은 봇물이 터진 듯 기사를 쏟아냈었다. “신기록 갱신” “요실금 팬티까지 챙겨” 따위의 기사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SNS의 반격은 예리했다. “스포츠 게임 중계하나” “시간만 재지 말고 내용도 전달해라”

홍수가 나면 식수가 동이 난다. 주류 언론의 말초적인 기사는 독자의 갈증만 부추겼다. 진짜 뉴스에 목마른 사람들은 새로운 샘을 찾았고, 길어 올린 물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발언 현장을 24시간 생중계한 국회TV는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이어가고 있다. 팩트TV의 유튜브 채널 시청자 수는 3만5천명까지 치솟았다. 네티즌들이 손수 만든 하이라이트 영상과 패러디물, 카드뉴스가 주류 언론 보도의 공백을 채우고 있다.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가로막는 여당 의원들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높이 오르고, 그들을 꾸짖는 댓글이 줄을 잇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무제한 토론 닷새째인 27일 오전, 필리버스터의 무대인 국회 본회의장. 의원석은 썰렁했지만, 방청석은 입추의 여지 없이 빽빽했다. 같은 시간, 네이버의 ‘뉴스스탠드’에선 필리버스터 기사를 찾기가 어려웠지만, SNS는 새 소식과 담론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요일, 신문이 쉬는 날임을 감안한다 해도, 뉴스의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도드라져 보였다. 뉴스 소비자들의 불만이 위험수위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날 17번째 토론 주자로 나서 11시간 39분 동안 발언을 이어간 정청래 의원은 SNS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막말 의원인줄 알았는데, 조리 있는 말솜씨가 최고”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필리버스터가 총선 정국의 흐름뿐만 아니라 주류 언론의 보도행태에도 일격을 가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신호이다.

기자들에겐 거슬리는 표현이겠지만, 국회는 정치뉴스의 대규모 생산단지라고 할 수 있다. 출하된 기사들은 대형 유통망인 포털을 거쳐 뉴스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된다. 몇 분만 늦어도 포털의 뉴스 진열대에서 밀려나기 때문에 속보경쟁이 치열하다. 기자들은 뉴스 가치를 판단할 겨를도 없이 속기사처럼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이런 숨가쁜 작업환경에서 균형 잡힌 뉴스 프레임은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 도 있다. 하지만 일그러진 뉴스 프레임은 함량미달의 기사와 선정적인 기사의 범람을 초래할 뿐이다.

‘민중총궐기대회’가 일어났던 지난해 11월, 주류 언론들은 ‘과격 시위와 과잉진압’이라는 뉴스 프레임에 맞춰 벽돌 찍어내듯 기사를 쏟아냈다. 언론학자들의 용어를 빌리면, 시위의 발생배경과 맥락을 전달하는 ‘주제적 프레임’의 뉴스는 찾을 길이 없었다. 곁가지 사건을 자극적으로 부풀린 ‘일화적 프레임’의 기사만 확대 재생산되었다. 알랭 드 보통은 그가 쓴 책 ‘뉴스의 시대’에서 이 같은 일화적 뉴스 프레임의 병폐를 통렬하게 지적한 바 있다.

“민주정치의 진정한 적은 뉴스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아니다. 현대사회에는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 이 힘은 가장 중요한 사안의 맥락을 대중이 제대로 파악할 수 없도록 무질서하고, 복잡하고, 단속적인 뉴스를 보도하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 진다.”

알랭 드 보통은 “언론은 민주주의의 보증인”이라고 강조한다. 뉴스보도를 통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주권행사를 돕기 때문이다. 주류 언론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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