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요청설’을 보도했다가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의 반발로 ‘굴욕적’ 반론보도까지 했던 KBS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도 중징계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KBS는 지난 6월 24일 ‘뉴스9’에서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리포트를 보도했다. 이 리포트는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KBS는 이 근거로 일본 야마구치현의 문서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 KBS 이승만정부 망명설 단독보도 후 “굴욕적 반론”)

12일 오후 열림 방통심의위 방송심의소위원회에선 해당 리포트가 야마구치현 공식 역사기록에 적시돼 있지 않은 ‘6월 27일’이라는 날짜를 이승만 정부의 일본 망명 요청일로 단정적으로 표기한 점과, 이해 당사자의 반론 기회를 주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자료가 아닌 일본의 사료를 근거로 보도했다는 점 등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 제2항과 제14조(객관성)을 위반했다며 법정제재인 전체 ‘주의’(벌점 1점) 의견으로 전체회의에 회부했다. 

   
KBS가 지난 6월 24일 보도한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 리포트. 현재 이 리포트를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상태다.
 

이날 의견진술을 위해 출석한 김태선 KBS 기자(전 국제부 데스크)는 “보도 이후 이승만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사실관계와 관련한 여러 문제제기가 있었고, 추후 확인 과정에서 ‘6월 27일’ 부분이 현사(縣史)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전반적 내용의 사실관계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핵심 중 하나인 날짜가 잘못된 사실이 드러나 이승만기념사업회 등과 내부 협의 과정을 거쳐 반론성 보도를 했다”고 밝혔다.

김 기자는 야마구치현의 문서에 나와 있지 않은 날짜를 적시한 이유에 대해선 “박재우 특파원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리포트 제작 자문 과정에서 정우종 박사(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의 도움을 받았고 개전 당시 상황에 대해 여러 자료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며 “정 박사에게 들은 날짜가 6월 27일이었고, 이를 현사와 착각했다는 게 해당 기자의 소명”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여권 추천의 함귀용 심의위원은 “KBS가 전쟁 초기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망명요청을 했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한다면서 최소한의 검증을 했어야 하는데 국제부 데스크는 특파원이 쓴 것을 그대로 보도국에 넘기고, 보도국 역시 검증 없이 보도한 것이 안타깝다”며 “현사엔 6월 27일이라는 기록이 한 마디도 안 나오는데 자막에까지 날짜를 넣어, 이 보도를 본 국민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이 터지자마자 일본에 망명가려 했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함 위원은 해당 리포트 말미에 “사실이라면 6·25 초기 정부의 상황이 어땠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덧붙인 것에 대해서도 “6·25 개전 초기 한 정부가 일본 정부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보도를 하려면 최소한 ‘사실이라면’이란 표현을 쓸 게 아니라 정말 사실인지 관련 사료를 다 찾아보고 취재해서 보도해야 하는 게 공영방송의 태도”라며 “6·25 동란을 전공한 역사학자 90% 이상이 반이승만 시각을 갖고 연구도 많이 했는데, 이들에게 조금만 물어봤어도 다나카 지사의 말에 대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라고 질책했다. 

여권 추천의 다른 위원들도 “1996년에는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서 먼저 기사를 썼음에도 이에 대한 확인을 게을리하고 최초보도라고 방송한 점”(고대석)과 “정부 공식 문서가 아닌 당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개인적 의견일 뿐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기정사실로 오인케 한 점”(김성묵) 등의 이유로 ‘경고’(벌점 2점) 제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KBS <뉴스9>는 지난달 3일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의 반론을 담은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 망명 정부 요청설’ 부인> 리포트에서 자사 단독 리포트에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야당 추천의 장낙인 위원은 “날짜와 관련한 부분은 분명한 오류이지만 리포트에서 현사를 뒷받침하는 미군정 기록을 인용하는 등 현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보도 자료가 있다는 점에서 보도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본다”며 행정지도 수준인 ‘권고’ 의견을 냈다.

박신서 위원도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망명에 대한 내용은 여러 문서에 나와 있고, KBS가 보도한 날짜가 아니었지 망명요청은 사실”이라며 “그런 점에서 의혹을 제기한 부분은 기사를 제대로 썼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권고’ 의견에 동의했다. 

이에 김성묵 위원장이 ‘경고’ 제재보다 한 단계 낮고 ‘권고’보다는 한 단계 높은 ‘주의’ 의견으로 합의하자고 제안해 결국 방송심의소위 전원 ‘주의’ 의견으로 전체회의에 부치기로 했다. 

아울러 심의위는 KBS와 같은 날 <이승만 한국전쟁 때 일본에 망명정권 타진>이라는 제목의 비슷한 내용을 보도한 YTN <뉴스 10>에 대해서도 제작진 의견진술을 듣기로 결정했다. 

앞서 KBS 보도국 간부들은 해당 보도 이후 이승만기념사업회 측 인사를 직접 만나 해명하고 지난달 3일 이승만기념사업회 측의 반론을 고스란히 실은 보도를 내보냈다. 이어 이인호 KBS 이사장은 6일 KBS의 이승만 정부 관련 보도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긴급이사회를 소집했다. 

아울러 KBS는 지난달 인사를 단행하면서 이승만 망명설 관련 보도라인에 있던 책임자들을 대거 발령 인사 명단에 포함해 ‘치졸한 보복성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관련기사 : KBS 이승만 망명 보도, 무더기 문책 인사)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지난달 15일 성명을 내고 “KBS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굴욕적 반론보도를 낸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해당 보도 책임 라인에 있는 간부 전원을 보직 해임해 명백한 징계성 인사를 단행했다”며 “조대현 사장이 차기 사장 선임권을 행사할 이사장에게 충성 맹세를 한 것”이고 비판했다.

KBS 기자협회도 “안팎에서 ‘굴욕적 반론보도’라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징계성 인사가 단행됐다”며 “정말 보도가 잘못됐다면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더 나아가 KBS 최종 책임자인 사장 본인이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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