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로 폭풍 같았던 그의 인생을 총결산한 것으로 보였다.

“환희여, 신성하고 아름다운 빛이여, 엘리지움의 딸이여! 우리는 불에 취하여 너의 성스런 땅을 딛네. 너의 마술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은 사람들을 결합시키고, 네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네!” -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4악장은 교향곡 역사상 처음으로 합창을 넣어서 신성한 도취와 드넓은 형제애를 노래했다. 천지개벽의 팡파레에 이어 목관악기가 1, 2, 3악장의 주제를 차례로 회상한다. 첼로와 콘트라바스가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 선율 말고 더 좋은 거”를 요구한다. <환희의 송가> 주제가 나지막히 등장하고 비올라가 이 선율을 받아서 노래한다. 점차 규모가 커지고 모든 악기가 가세한다.

베토벤은 네 명의 독창자와 웅대한 합창, 피콜로 · 심벌 · 트라이앵글 등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벅차게 환희를 노래했고, 이로써 ‘고뇌를 너머 환희로’ 가는 그의 위대한 음악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1824년 5월 <환희의 송가>를 초연한 뒤, 50대 중반을 너머 죽음을 향해 가는 그의 내면을 5곡의 현악사중주곡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좀 더 내밀한 마음을 좀 더 작은 악기편성에 담아낸 것이다. 하이든, 모차르트가 어엿한 예술장르로 승격시킨 장르인 현악사중주곡은 베토벤의 손으로 극한까지 발전했고, 이후 낭만시대 모든 현악사중주곡의 전범이 되었다. 무엇보다, 인간 베토벤의 달관한 정신세계를 담아낸 걸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곡들을 듣고 또 들으며 감동받는 것이다.

   
▲ 린제이 사중주단이 연주한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집. 인생의 온갖 신고(辛苦)를 겪은 뒤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고 명랑했다.
 

이 곡들은 인간 지혜의 극치를 들려준다. 이미 지나간 비극을 되새기며 상심하는 것은 필요없다.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현재를 망치는 것도 어리석다. 오직 현재에 살고 기뻐하면 된다. 인생의 막이 내리는 순간을 앞두고 이 단순함에 도달한 베토벤의 모습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5곡의 후기 현악사중주곡,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16번 F장조에서 베토벤은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묻고 답한다. 마지막 악장 앞머리에 그는 ‘힘들게 내린 결심’이라는 표제를 달았다. 첫 부분, ‘그라베’(grave)라고 표시된 엄숙한 서주의 악보에 베토벤은 써 넣었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Muss es sein?)” 이어지는 알레그로(allegro)는 밝고 명랑하게 장난치는 듯한 느낌이다. 이 대목의 악보에 그는 이렇게 써 넣었다. “그래야만 했어! (Es muss sein)" 자문자답하는 이 동기들은 곡의 마지막 부분에 격렬하게 충돌하지만, 바이올린의 익살스런 독백에 이어 다 함께 단정하게 마무리한다. “희극은 끝났다.” 베토벤이 죽음의 병상에서 남겼다는 말을 음악으로 옮겨놓은 듯한 피날레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6번 F장조 Op.135중 4악장
https://youtu.be/4GmF1RdcRdg (연주 사이프러스 현악사중주단)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들은 내면의 흐름에 따라 유유자적하며 작곡한 듯, 고전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작곡한 순서대로 보면 12번 Eb장조 - 15번 A단조 - 13번 Bb장조 - 14번 C#단조 - 16번 F장조인데, 12번은 네 악장, 15번은 다섯 악장, 13번은 여섯 악장, 14번은 일곱 악장으로, 악장 수가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구성도 점점 더 복잡해진다. 그러나 마지막 16번 F장조는 다시 네 악장의 구성을 취했고, 규모도 무척 작다. 인생에 대해 뭐, 더 길게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인생의 온갖 신고(辛苦)를 겪은 뒤 힘들게 내린 결론은 가장 단순하고 명랑했다.  

그런데, 이 16번 사중주곡은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아니다. 이미 발표한 13번 사중주곡의 피날레를 다시 써야 했기 때문이다. 6악장으로 된 13번의 피날레는 특이하게도 ‘대푸가’였다. 청중들은 이 ‘대푸가’가 너무 길고 어렵다고 생각했고, 아르타리아 출판사 측에서도 악보 판매가 저조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써 달라고 부탁했다. 베토벤은 “제일 좋은 게 바로 그 대목인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역정을 냈지만, 이순(耳順)의 경지에 접어든 인간답게 이 요구에 응해서 좀 더 단순한 피날레를 새로 작곡해 주었다. ‘대푸가’는 Op.133으로 따로 출판했다. 13번 사중주곡 Bb장조의 새 피날레야말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인 셈인데, 이 곡은 베토벤의 모든 작품 중 가장 즐겁다. 어두운 그림자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명랑한 이 작품이 베토벤의 마지막 노래였다.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중 6악장
https://youtu.be/gu8CJ9Q_sB0 (탈리히 현악사중주단)

 

 

 

이 피날레 직전에 있는 5악장 ‘카바티나’는 베토벤의 작품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인류를 대표하는 클래식 곡 중 하나로 보이저호에 탑재되어 이제 막 태양계를 벗어나서 날고 있는 이 ‘카바티나’를 들어보자.

   
 
 

 

베토벤 현악사중주곡 13번 Bb장조 Op.130 중 5악장
https://youtu.be/MAttnQupeeg (탈리히 현악사중주단)

 

 

 

‘카바티나’는 짧고 단순한 노래란 뜻이다. 베토벤은 이 5악장에서 가장 순박한 마음으로 인생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행복을 위한 또 하나의 지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베토벤은 이 무렵 체득한 게 분명하다. 고뇌와 시련으로 가득한 인생이었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는지! 베토벤은 충만한 가슴으로 감사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은 15번 A단조의 3악장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이 느린 악장의 악보에 ‘병이 나은 이가 신에게 바치는 감사의 노래’라고 써 넣었다.

오늘도 세상은 깊이 병들어 있다. 자본은 혼탁한 아귀다툼으로 시끌벅적하다. 필시 권력 있는 자의 아집이 이 병든 세상을 더 혼탁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해답의 실마리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베토벤의 사중주곡이 말해 주는 지혜를 들을 귀도, 느낄 가슴도, 배울 머리도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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