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머슴’을 자처하는 이종윤 선생은 예악(禮樂)에 대한 공자(孔子, BC551~479)의 가르침을 실현한 음악가가 바로 모차르트라고 주장했다. 모차르트는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즐겁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다치지 않는다)이라는 공자의 음악 이념을 가장 잘 표현한 음악가라는 것이다. 이 선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럽에 전한 공자의 사상이 유럽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모차르트 음악이 나오게 됐다고 보았다. 

이 추론은 다소 비약이 있는 것 같긴 하다. 공자는 군신(君臣)의 위계질서가 확립된 주공시대를 이상향으로 간주한 보수적인 사상가였다. 이 점에서, 프랑스 혁명에 열광한 모차르트와는 정치 성향이 같을 수 없었다. ‘공자 사상 - 유럽 계몽주의 - 모차르트 음악’으로 연결하는 건 지나친 단순화로 보인다. 두 사람이 알고 있던 음악은 무척 달랐을 것이다. 동서양의 차이는 물론 2,200년 세월의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종윤 선생의 견해는 모차르트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왜 그런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낙이불음(樂而不淫) :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
http://youtu.be/2oNnugi3yLU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인 1791년 가을, 클라리넷 연주자인 친구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작곡한 협주곡.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이 가득하며,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와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세 악장으로 돼 있다. 
     

   
 
 

 

애이불상(哀而不傷) :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G단조 K.550
http://youtu.be/JTc1mDieQI8
  

 

 

 

모차르트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기 시작한 1788년 여름에 39번 Eb장조, 41번 <주피터>와 함께 작곡한 교향곡. 이 곡을 완성할 무렵 넷째 아이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났다. 삶의 비극적 의미와 죽음에 대한 상념을 깊은 서정미로 표현한 작품이다. 아주 빠르게-천천히 걷는듯-다소 빠른 메뉴엣-충분히 빠르게, 네 악장으로 이뤄져 있다.   

   
▲ 1790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 모차르트. 공자의 사상에 비추어 모차르트 음악을 ‘선하고 예의바른 음악’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공자 시대의 음악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는 음악을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평가했다. 정직하고 올바른 친구, 너그럽고 착한 친구,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친구는 내게 도움이 된다. 군자(君子)가 바로 이런 친구다. 편파적인 친구, 마음 약한 친구, 말이 앞서는 친구는 내게 해를 준다. 소인(小人)이 바로 이런 친구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정직하고 너그럽고 깊이 있는 음악은 좋은 음악이고, 그렇지 않은 음악은 해롭다. 공자는 음악도 사람처럼 선(善)해야 하고 예(禮)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종윤 선생이 “모차르트 음악은 선하다”, “모차르트는 예의바른 음악이다” 강조하신 건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관저’는 공자가 좋아한 노래 중 하나였다고 한다. 어느 임금과 요조숙녀 사이의 사랑을 읊은 노랫말.  “여기저기 자라난 물냉이, 오른쪽에서 따고 왼쪽에서 따네.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깨었을 때도 잠들었을 때도 같은 소망이네.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칠현금을 갖고 그 곁에 서자꾸나. 얌전한 아가씨, 곱고도 예쁘구나, 북과 종을 갖고 아가씨에게 즐거움을.”

사랑에 빠진 임금은 거칠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음속의 여인을 북돋워 주고 즐겁게 해 주려고 할 뿐이다. 공자는 정나라 음악이 말초적인 즐거움만 준다며 부정적으로 보았다. 정나라 남녀들은 강가에 모여 “서로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노래를 불렀고, 그 노래는 관능을 즐겁게 해 주었고, 현악기의 교묘한 조작이 욕망을 부채질했다.” 공자가 볼 때 이 음악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을 담고 있었다. 공자는 안회에게 “이 음악이 나라를 망칠 것”이라고 했다.

공자가 가장 사랑한 음악은 <소>라는 옛 음악이었다고 한다. 순 임금의 조정에서 연주한 이 곡은 순 임금의 즉위 과정을 담고 있었다. 요(堯) 임금이 ‘깊은 산속에 살면서도 덕에 대한 사랑이 격류보다 강한 순(舜)’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욕망을 담지도 않았고 열정적인 음악도 아니었지만, 귀신도 새도 짐승도 끌어들여 굴복시키는 힘을 가진 음악이었다. <서경>에 따르면, 순 임금 앞에서 이 음악을 연주할 때, “아홉 개 악장이 끝나갈 무렵 봉황이 짝을 지어 날아 내려왔다”고 한다. 

그가 볼 때, 주나라 무왕의 업적을 찬양한 <무> 음악은 아름답지만, 선하지는 않다.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해 무기를 들고 정복에 나서는 내용이기 때문에 선할 수 없었다. 반면, 순 임금은 무기를 들지도 않았고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평화의 길을 통해 천자의 지위에 올랐고, 도덕적 힘을 통해 천하를 얻었다. 따라서 공자가 볼 때 아름다우면서 완벽하게 선한 음악은 <소>뿐이었다. 

공자는 “예(禮)는 악(樂)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음악이 문화의 궁극적 열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은 개인의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정치질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맹자에 따르면, “공자의 일생은 완벽하게 맞춰진 하나의 연주처럼 시작 종소리에서 마지막 옥피리 소리까지 이어지는 내면의 질서가 있었다.”  

공자는 늘 소인을 폄하했지만, 대다수 민중을 구성하는 소인을 멸시한 게 아니라, 소인이 군자 행세를 하는 것을 참지 못했을 뿐이었다. (김시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웅진지식하우스, p.118) 소인들이 국가와 언론을 장악한 이 나라, 예(禮) · 의(義) · 염(廉) · 치(恥)가 실종된 척박한 땅에서 착하고 예의바른 음악이 설 자리가 있을까.  

※ 공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안핑친 <공자평전> (김기협 옮김, 돌베게, p.202~p.209)을 주로 참고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