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 불리한 일이 생기면 사전에 쓰지 말아달라고 하거나 나간 경우는 빼달라는 요청이 왔다. 해당 부서가 강력히 우겨 기사가 몇 차례 나가자 삼성에서 우리 신문사를 성토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하니까 기업 요구를 외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언론이 기업에 과도하게 쓰는 기사도 많다. 목적이 뻔히 보이는 기사들이 자주 눈에 띈다. 누가 봐도 광고를 끌기 위한 억지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기사가 범람하는 게 부끄럽다.” 

삼성 등 대기업 광고주에 의한 언론사 편집권 침해나 탄압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편집권을 가진 책임자 누구나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경영상의 이유로 순응하거나 오히려 자초하는 모순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감내하는 게 ‘공존’이 아닌 ‘공멸’을 앞당기는 길이라면?

   
지난해 5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던 아시아엔이 지난해 12월 29일 기사를 삭제했다.
 

앞서 인용한 발언은 우리나라 10대 종합일간지(경향신문·국민일보·동아일보·문화일보·서울신문·세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한겨레·한국일보) 전·현직 편집국장들이 실제로 증언한 내용이다.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이충재(55)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각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편집권의 독립과 자율성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분석하기 위해 지난해 14명의 10대 일간지 전·현직 편직국장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관련기사 : “디지털퍼스트? 콘텐츠 신뢰 안 하는데 성공하겠나”)

이 위원은 다음 달 정식 등재될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을 통해 현재 신문사 편집국장들이 사주와 경영진, 광고주 등의 압박 속에서 어떻게 편집권 침해를 경험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 논문에서 주목할 점은 실제 편집국장들이 사주나 경영진의 압력보다도 대기업 광고주를 편집권 침해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는 점이다. 

“삼성, 조금만 불리하게 기사 쓰면 직접 압박해 가장 골머리”

한 신문사 인터뷰 대상자는 “대기업으로부터 기사 조정을 요구하는 전화를 자주 받았다. 굉장한 부담감을 느꼈고 사실상 무시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면담자도 “신문사에서 기업에 광고와 협찬에서 아쉬운 소리를 종종 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기사를 빼거나 할 수는 없지만 단수 조정 정도는 해줬다”고 밝혔다.

이 위원은 “광고주들 가운데 각 신문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삼성’이었다”며 “거의 모든 인터뷰 대상자들이 삼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고 기자들과의 갈등도 상당 부분이 삼성 기사와 관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이 만난 여러 편집국장 말에 따르면 삼성은 조그만 기사라도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전화해 ‘편집’을 요구했다. 이를 원하는 대로 반영하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토로하고 신문사에 대한 광고나 협찬 등의 지원액을 거론하며 불만을 제기했다. 

아울러 이 위원은 사주 소유가 아닌 우리사주조합이나 국민주의 소유 구조를 가진 신문사는 광고주 요청에 상대적으로 엄격한 모습을 보이거나 노조의 감시 기능이 작동하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사가 광고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일부 면담자들은 신문사가 먼저 기업에 정당하지 않은 광고와 협찬을 요구하는 지금 상황이 광고자본의 간섭을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며 “연초가 되면 사장과 함께 대기업들을 돌아다니며 광고와 협찬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다녔다는 편집국장들도 여러 명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18일자 한국일보 지면에 실린 삼성중공업 관련 기사가 이날 온라인에서 삭제됐다.
 

광고주를 비판하는 기사를 발제하고 기사화하는 데 있어 편집권의 제약이 가해진다면 가장 부당함을 느낄 대상은 일선 기자들이다. 그러나 사주의 유무를 떠나 기자들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는 등 조직의 감시기능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는 것 또한 편집권 침해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꼽혔다.

전·현직 편집국장들은 “공보위가 조직돼 정기 모임을 하고 회의 결과를 작성해 기자들에게 알리지만 예전보다 관심과 열의가 현저히 줄었다”거나 “신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편집권 침해를 어느 정도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생뚱맞게 보인다”고 하는 등 기자들의 감시 기능이 상당히 무력해졌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어려울수록 편집국장이 중심 잡고 편집권 지켜내야 산다” 

이에 대해 이 위원은 “민실위와 공보위 등 지면 감시와 자율성 확보를 위해 마련된 기자들의 조직이 대체로 유명무실하다는 견해가 많았다”며 “신문의 위기 속에서 경영 위축을 의식한 자기검열과 현실 순응적인 기제가 은밀히 작동하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리저리 휘둘리는 편집국의 편집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위원은 경영진과 기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편집국장들의 이중적 위치와 태도를 인정하면서도, 어려울수록 가장 큰 소임을 맡고 있는 편집국장이 확고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은 지난 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도 “사주나 경영진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편집국장이 뭔가를 감행하기엔 필요충분치 않은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변화를 가할 수 있는 키를 쥐고 있다고 본다”며 “신문의 위기 상황 속에서 정도를 지켜나가기 위해 편집국장이 그런 권한과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알고도 행동에 옮기는 데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위원은 신문의 위기, 디지털 저널리즘으로의 전환기에도 결국 콘텐츠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지 않으면 편집권 침해와 경영 악화라는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분명한 것은 뉴스를 공급하는 플랫폼이 무엇이든, 종이든 인터넷이든 모바일이든 간에 좋은 콘텐츠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올바른 정보와 깊이 있는 해설, 수준 높은 분석 기사는 미디어 환경 변화와 무관하게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저널리즘의 가치, 언론의 공공성 회복이 뒷받침돼야 한다.”

저널리즘의 본령을 되새기는 것이 시대착오가 아닌 언론의 존재 이유이자 생존 방법이라는 것, 그가 모든 편집국장을 대신해 우리 언론에 갈구하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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