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문에 실린 ‘가을, 자원방래’라는 제목의 독자 수상(隨想) 중 몇 대목이다.

<…창조주께서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들판에 선선한 바람을 풀어 놓는 것을 불역낙호(不亦樂乎) 즐거운 마음으로 느긋하게…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고 여름을 이겨낸 우리들은 더 위대했다. 그런 우리를 향해 가을이 자원방래(自遠方來) 제 스스로 오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 터이니 다만 마지막 단맛이 과실 깊숙이 스며들 때 까지…>

아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서정적인 시 ‘가을날’(구기성 譯)의 몇 대목이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그 독자수상의 투고자는 ‘릴케’와 ‘공자(孔子)’를 절묘하게 섞어 ‘자신의 글’로 지어냈다. 나머지 부분의 표현이나 분위기까지도, 과연 그 글이 그의 글인가 긴가민가다. 요즘 인터넷에서 인기 있는 글인 것 같다. 내가 편집자였다면 그 글을 싣지 않았으리라.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따붙이기 글쓰기를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다. 표절(剽竊) 즉 글 도둑질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차치(且置)하고라도, 저런 글을 ‘내 독자’에게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공자님’ 얘기는 있는데, 릴케의 시나 이미지를 빌렸다는 얘기는 그 글에 없다.

또 하나, 저 글 중 ‘자원방래(自遠方來) 제 스스로 오고 있는 것…’이란 문구 때문이다. 저걸 본 많은 독자들이 엉터리 뜻으로 오해했을 개연성이 크다. 단순한 착오가 아닌, 본질적인 이유가 바닥에 깔려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疑懼心)을 필자는 가지고 있다. ‘자원방래’는 공자 논어(論語)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의 한 문장이다. 

질러 말하자면, 자원방래의 ‘자원’과 자원봉사(自願奉仕)의 ‘자원’을 같은 말로 알고 쓴 글일 수 있겠다는 우려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하는 워낙 많이 퍼져있는 해석을 그 글(독자수상)도 언급하기는 했다. 그러나 인용한 부분의 ‘제 스스로 오고 있는 것’과 ‘자원방래’는 문맥상 같은 말이다. 투고자의 지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다른 글들의 수많은 ‘자원방래’들도 ‘스스로[自] 원(願)해서 찾아 온 것’이라고 새기거나 그 새김의 뉘앙스를 짙게 풍기는 것이 상당수다. 어떤 글은 ‘스스로 원해서 멀리서 찾아 온 것’이라는 절충(折衷) 또는 개량의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말의 구조를 들여다보자.     

‘자원방래’는 자(自)+원방(遠方)+래(來)다. 여기서 自는 ‘~으로부터’의 뜻이다. ‘멀다’는 遠과 ‘지방’ 方은 합체되어 ‘먼 곳’이다. 來는 ‘오다’이니 ‘먼 곳으로부터 오다’가 된다. 같은 용법의 自가 들어간 자초지종(自初至終)은 ‘처음[初]부터[自] 끝[終]까지[至]’라는 말이다. 

‘자원봉사’의 구조는 自+원(願)+봉사(奉仕)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봉사다. 여기서 自는 ‘스스로’의 뜻이다. 자원(自願)은 영어의 볼런티어(volunteer)다. 

自의 일반적인 뜻은 자기, 스스로, 저절로 등이나 ‘~으로부터’의 뜻도 있다. 같은 발음이라고 하여 두 ‘자원’을 같은 단어로 여긴 것에서 비롯된 문제겠다. 한자가 생활과 학교, 그리고 신문에서 왕따 신세가 된 후 빚어지는 현상이다. 핀트 어긋난 문자들이 많이 보인다. 

어떤 말은 속뜻을 지닌다. 우리말의 한자어는 특히 그 속뜻이 풍부하다. 사전 보면 안다.

   

▲ 강상헌 평론가·우리글진흥원장

 

 

< 토/막/새/김 >

'원족'이란 말 아는 이는 50대 위쪽이다. 소풍의 그 시절 이름이다. 고구마 사이다 든 가방 메고 멀리[遠] 걸어[발 족(足)] 죽도봉에 올랐다. 소풍(逍風)은 ‘거닐며 바람을 쐰다’는 뜻이다. 요즘은 대개 버스를 타고 가니 ‘거닌다’는 소풍도 어색할 듯하다. 원방(遠方)이란 말도 그 땐 자주 쓰이는 단어였다. 학기 초 선생님 가정방문 순서는 ‘원방부터’였다. 먼 데 사는 친구 집을 먼저 가셨다. 고구마 사이다를 잘 대접했다. 원족도 원방도, 사라지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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