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나타 Bb장조 D.960 http://youtu.be/0CAtqP8esPQ

슈베르트(1797~1828)는 31살 짧은 생애에 엄청나게 많은 곡을 썼다. 650곡의 노래를 남겨 ‘가곡의 왕’으로 불리며 오페라, 종교음악,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모든 장르에서 숱한 걸작을 남겼다. 음악사에서 모차르트를 제외하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슈베르트의 마음은 언제나 선율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가 음악가로 인정받기 위해 밤낮없이 애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침마다 곡을 쓴다. 한 곡을 완성하자마자 또 다른 곡에 착수한다.”  

슈베르트는 10대 시절 임시 교사 생활을 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16살 되던 1814년 가을, 첫사랑이 찾아왔다. 그가 활동하던 교회 성가대의 소프라노 테레제 그로프였다. 슈베르트는 1815년 한해에만 <마왕>, <들장미>, <달에게 부침>, <소녀의 탄식> 등 무려 144곡이나 되는 빼어난 가곡을 썼고, 작곡하는 내내 테레제를 그리워했다. 이 많은 노래는 단 한 푼도 현금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 10대 시절의 슈베르트
 

‘내면의 방랑자’ 슈베르트는 꿈과 음악에서 충만감을 맛볼 수 있었다. 사랑의 상처마저 달콤한 선율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은 언제나 그를 빗겨갔다. 당시 음악가는 오페라로 성공해야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는데, 그가 작곡한 17편의 오페라는 모두 인기가 없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피아노 소나타를 썼지만,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 있는 빈 음악계에 자기 작품을 내밀지 못했다. <군대> 행진곡 등 네 손을 위한 작품을 40여 곡 썼지만, 친구들의 모임에서 연주하는데 그쳤을 뿐, 대중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   

음악 친구들의 모임 ‘슈베르티아데’의 한 친구는 훗날 말했다. “우리는 모두 슈베르트가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위대한 천재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슈베르트는 평생 경제적으로 불우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작곡가들은 교회와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두 ‘자유 음악가’가 됐지만, 안정된 생계를 꾸리는 일은 오히려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무한경쟁와 승자독식 시대가 시작됐고,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판업자들은 언제나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었다. 대중에게 낯선 슈베르트에게 작곡료를 치르는 것은 출판업자들에게는 모험이었다. 18살 되던 1816년 7월 17일 그는 일기에 썼다.

“오늘 처음 작곡으로 돈을 벌었다. 칸타타 한 곡의 작곡료로 100굴덴을 받았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의 혁명 전쟁이 막을 내리고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가 들어서고 있었다.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신흥 부르주아는 떠들썩한 왈츠와 유흥 음악에 탐닉했다. 슈베르트는 이러한 사회의 세속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내면의 깊은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 고립감 속에서 오히려 마음속의 황홀한 빛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선배 작곡가 모차르트나 베토벤에서 볼 수 없었던 낭만주의 음악의 중요한 특징이 됐다. 그는 해가 갈수록 더 치열하게 노력했다.

주어진 수명이 몇 해 남지 않았음을 슈베르트도 예견한 것일까. 그는 매우 급하게 작품을 썼다. 한 나절이면 한 곡을 완성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줄줄이 쏟아냈다. 초인적인 집중력이었다. 1822년, 매독에 걸린 해부터 슈베르트가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역설이다. 그는 여전히 무일푼이었다. 작곡료를 받기만 하면 친구들과 만찬을 벌여 모두 써 버리곤 했다. 낭만과 공상에 빠져 평생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 슈베르트는 31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완성> 교향곡과 <대교향곡> C장조는 그의 사후 발견됐다. 그가 남긴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 슈베르트가 교향악과 피아노 음악의 대가로 인정받은 건 그가 사망하고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마지막 해, 목숨을 건 작곡은 계속됐다. 소심한 성격의 슈베르트는 대중 연주회를 기피했지만, 1828년 3월 처음 공개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뒀다. 슈베르트는 이 연주회로 꽤 큰 돈을 벌었고, 생전 처음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그가 죽던 해에 쓴 세 곡의 소나타(D.958, 959, 960. ‘도이치 번호’로 불리는 ‘D’는, 1951년 슈베르트의 작품을 정리해서 목록을 만든 음악학자 오토 도이치의 이름에서 따 왔다)는 슈베르트의 특징인 ‘방랑자 의식’을 담고 있는데, 깊은 영혼의 울림과 서정성을 들려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31살 짧은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한 세 소나타를 슈베르트는 어렵게 장만한 자기 소유의 피아노를 쳐 가며 작곡했을 것이다.  Bb장조로 된 마지막 소나타 D.960은 외로운 천재 슈베르트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이라 할 수 있다. 방랑자의 시정을 담은 한 프레이즈가 끝날 때마다 검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트릴이 이어지는데, 작곡 당시 슈베르트의 어두운 심경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슈베르트는 가난하던 시절, 일기에 썼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는 그저 작곡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한번 살다 갈 인생의 여행길,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사방에 가득하다. 음악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작은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슈베르트는 마지막 가곡 <바위 위의 목동>에서 노래했다. “봄이 왔다. 봄, 나의 기쁨. 이제 나는 여행을 준비할 것이다.”

꿈꾸는 방랑자는 텅 빈 피아노를 남겨두고 봄을 찾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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