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s_xS8OLQYI0
(크리스탄 틸레만 지휘, 빈필하모닉 관현악단, 2010)

재보선, 답답하지만 관심을 끊을 수 없다. 사방이 꽉 막힌 세상이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만드는 유일한 합법 절차가 선거 아닌가. 최선의 후보를 뽑으면 좋지만 여야가 오십보백보니 - 그게 꽤 큰 차이라는 의견도 물론 타당하다 - 최악의 후보를 떨어뜨려서 위안을 찾자는 심정으로 투표소를 향한 게 이미 오래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휴가를 갔단다. 말로는 “잊지 않겠다” 하면서 속으로는 “잊으라, 잊으라” 하는 거짓의 몸통이다. ‘미개한’ 서민을 속이지 않으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 그들은, 일제히 휴가를 떠남으로써 세월호 논란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속마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대한민국 현실을 조금 돌아보니, 벌써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혼탁해진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음악가에게 저주라 할 수 있는 청력 상실이 하필이면 가장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에게 찾아왔을까? 물론 베토벤은 속세의 잡다한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고, 그 결과 누구보다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론일 뿐, 젊은 베토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비극이었다.

베토벤에게 청력 상실은 이중의 고통이었다. 치료하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귀가 들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릴 수 없었다. 다정다감한 그였지만 사람을 피하게 됐고, 성격이 괴팍하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1802년 10월, 그는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비통하게 호소했다.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그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사람들에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마음을 토로할 수도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 1802년 10월 6일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베토벤을 일으켜 세운 것은 예술이었고, 인류에 대한 사명감이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베토벤은 ‘운명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일어나 불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불행한 사람들이여! 한낱 그대와 같이 불행한 사람이, 온갖 타고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이름에 값닿는 사람이 되고자 온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라.”

지치고 절망한 그는 대자연의 품에서 힘과 위안을 얻었다. 베토벤은 1808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할 때 <전원>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오후 2시까지 일을 한 뒤 저녁이 되도록 산책을 하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베토벤은 자필악보 표지에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고, 각 악장에 표제를 붙였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기분’, 2악장 ‘시냇가의 풍경’, 3악장 ‘시골 축제’, 4악장 ‘천둥과 폭풍’,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3, 4, 5악장은 휴식없이 연주된다.

월트 디즈니는 이 곡을 올림포스 산의 하루에 빗대어 만화영화 <판타지아>를 만들었다. 뿔 하나 달린 유니콘, 반인반수인 켄타우루스, 하늘을 나는 말들, 그리고 아기 요정들이 나와서 어울리는데, 그 중 4악장 ‘천둥과 폭풍’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판타지아>(1940) 중 <전원> 교향곡 4악장 ‘천둥과 폭풍’,
5악장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http://youtu.be/UlIbtvuzdrc

다섯 악장을 통해 완결된 스토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곡을 ‘표제음악의 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 자연 현상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808년 동짓날,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초연됐다. 저녁 6시반에 시작해서 10시반까지 이어진 이 어마어마한 연주회에서 베토벤은 1부 첫곡으로 교향곡 6번 <전원>교향곡을, 2부 첫곡으로 교향곡 5번 C단조를 지휘했다. 두 곡은 같은 날 세상에 나온 쌍둥이인 셈인데, 베토벤의 대조적인 두 얼굴을 보여준다. 5번은 비극적인 운명과 투쟁하여 승리하는 베토벤, 6번은 무한히 자연을 사랑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이다. <운명>보다 <전원>이 먼저 연주됐지만, 악보 출판할 때 순서가 바뀌어 <운명>이 5번이 되고 <전원>이 6번이 됐다.

혼탁한 나날, 대자연의 힐링이 절실하다. 자연의 품에서 잠시 쉴 때, 베토벤 <전원> 교향곡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자연을 예찬하지만, 결국 인간을 위로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다. 베토벤이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하더라도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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