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60번 C장조 <멍청이> http://youtu.be/-ue1Uul5Lf4
  교향곡 22번 Eb장조 <철학자> http://youtu.be/sDao1KAJ01Q

에스터히치 시절, ‘파파 하이든’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했습니다. 그는 연주자들의 결혼식에서 증인이 돼 주었고, 신랑 들러리를 서 주었고, 자녀들의 대부가 돼 주었습니다. 그는 단원들이 해고 위협에 처했을 때 웬만하면 나서서 보호해 줬습니다. 1765년, 플루트 주자인 프란츠 지글이 공작 소유의 집 근처에서 장난을 치다가 큰 불을 낸 일이 있습니다. 지글은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해고됐지만, 하이든의 청원으로 3년 뒤 복직됐습니다. 1768년 크리스마스 직전, 공작의 장원(莊園) 지배인 라이허가 단원 두 명을 해고 목록에 올리자 하이든은 “음악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며 만류했습니다. 1769년 라이허가 “공작의 허락 없이 동료 가수와 결혼하려 했다”는 이유로 연주자 한명을 해고하려 했을 때도 하이든이 개입해서 보호해 줬습니다.
    

   
 
 
하이든은 단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한 악장이었습니다. 그가 강제하지 않아도 음악가들이 스스로 존경하며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의 총애를 받는 걸 질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주자들이 걸핏하면 무단결근한다”, “궁정의 음악서적과 악기가 없어지곤 한다”며 하이든의 느슨한 운영 방식을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치는 하이든에게 전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이 이뤄낸 음악 수준에 만족했기 때문이지요.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이 더욱 왕성하게 작곡에 전념할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늘 신경을 썼습니다.

에스터하치 시절, 하이든의 삶이 언제나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64년 말, 하이든은 에스터하치 공에게 약을 사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심각하게 아팠습니다. “저는 지난 며칠 동안 여러 번 상태가 나빠졌고, 전보다 훨씬 더 심해졌습니다.” 음악가에게 약을 사 주는 건 선례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에스터하치 공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 비용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하이든은 이듬해 봄, 드디어 회복됐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이든이 모차르트보다 더 젊은 나이에 죽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 시절, 불은 왜 그리 자주 났을까요? 1768년 8월, 아이젠슈타트에 큰 불이 나서 19채만 남고 온 마을이 다 타 버렸습니다. 돈을 꿔서 장만한 하이든의 집도 타 버렸습니다. 악보와 살림살이가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린 하이든 가족은 사실상 알거지가 된 거죠.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의 집을 다시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1776년엔 더 큰 불이 났고, 두 시간 만에 아이젠슈타트 전체가 타 버렸고 사람이 16명 죽었습니다. 하이든의 집은 또 불탔고, 소중한 악보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공작은 이번에도 복구 비용을 모두 대 주었습니다. (데이비드 비커스 <하이든, 그 삶과 음악>, 김병화 옮김, 낙소스북스, p.45~72 내용 참고)
 

   
 
 
흠…. 매우 너그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모든 걸 귀족이 혼자 갖고 있었다는 증거도 되겠네요.^^ 아무튼, 하이든이 에스터하치 공에게 감사하며 마음을 바친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이든과 에스터하치 공 사이엔 친절과 신뢰의 선순환 구조가 이뤄져 있었습니다. 하이든은 음악으로 에스터하치 공을 섬겼습니다. 에스터하치 공은 하이든을 철저히 뒷받침하고 자율성을 보장해 줌으로써 결국 하이든이 ‘귀족의 종’이 아니라 ‘음악의 종’이 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건 결국 에스터하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죠.

   
 
 
1774년, 하이든의 교향곡 60번 <멍청이>가 초연됐습니다. 당시 인기 있던 연극 <멍청이> 공연에 삽입한 음악을 6악장으로 엮어서 만든 신나는 교향곡, 꽤 파격적인 형식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은 이 <멍청이> 교향곡의 작곡자 하이든의 ‘위트, 이성, 바른 정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즐거움 음악 속에 지혜가 숨어 있었다고 할까요?

이에 앞서 1764년, 그의 교향곡 22번 <철학자>가 초연됐습니다. 이 별명은 하이든이 아니라, 그의 생전에 이름 모를 출판업자가 붙였습니다. 1악장 프렌치 호른과 잉글리시 호른이 주고받는 느린 대화가 철학자의 문답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하지만, 1악장의 철학적 대화가 끝나면 2악장, 경쾌한 프레스토가 이어집니다. 철학적 깨달음이 작은 즐거움을 낳은 걸까요? 철학적 지혜와 순수한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위트, 이성, 바른 정신’으로 찬양받은 ‘파파 하이든’, 그는 에스터하치 공이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든 즐겁게 공존하며 언제나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음악을 통한 즐거운 만남, 하이든의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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