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이 칼럼의 대상이자 주인공인 정조문 선생의 한자 이름을 상편(上篇)에서 잘못 표기했다. ‘정조문’에서 가운데 ‘조’자는 고할 조, 알릴 조 ‘詔’인데, 비출 조 ‘照’로 틀리게 표기하였기에 선생의 한자 이름을 ‘鄭詔文’으로 바로 잡는다. <필자 註>      

조선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나?

한국사학자 조광(趙珖)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역사에서 변화와 발전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야만이 문명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다산 정약용은 일본의 문화수준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다산 정약용도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을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가고 있었다. 이때 정약용은 일본의 유학에 접하고 나서 일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일본 고학파(古學派)의 대표적 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및 오규 소라이(荻生狙徠, 1666-1728), 다자이 순다이(太宰春台, 1680-1747)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들의 글을 읽고서 이제 일본은 군사력에 의존하여 이웃나라를 약탈하던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유학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의를 알게 된 개명된 나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이 계열의 학파 외에도 국수를 지향하는 국학파의 인물들도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다산 정약용은 이들의 글까지 철저히 검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한 면만을 보고서 그 진면목을 본 듯이 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떠나고 40년 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강요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시작되었고, 그 후의 한일관계는 두 나라의 국민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길로 내달았다. 물론 그 불행은 가해자였던 일본인보다 피해자였던 한국인들에게 더 큰 고통으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도 된다고 잠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일본에 관한 정보가 넘쳐난다. 다산 정약용이 살아나서 오늘날의 일본을 바라본다면, 그는 일본에 대해서 과거사의 정리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독도문제가 역사문제임을 밝힐 것이다. 또한 역사문제의 해결에는 소홀하면서도 독도를 방문하는 수미불상통(首尾不相通)한 일을 나무랄 것이다.”라고 썼다. -다산연구소(www.edasan.org) <다산 포럼> 8월 17일자

일본의 19, 20세기는 ‘문명이 야만’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1930년대 일본 문부성발행, 일본황국사관을 교본으로 한 '国体の本意' 도서
 
막부시대(徳川幕府 1603년~1868년)의 몰락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대패하기까지 일본을 77년간이나 지배했던 일본 천황사관인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본의 국학인 ‘고쿠가쿠’, 국학(国学)에 기초한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중반에 발생한 일본 국수주의적인 학문인 ‘국학’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란가쿠’, 난학(蘭學)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1603년 3월 에도에 막부(사무라이 왕조체제)를 연 시기인, 지금 도쿄의 옛 이름인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양대 학문이었다. 일본 국학은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한학(漢學)과 불경(佛經) 등 외래문화중심의 학문구조를 비판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 사상, 정신세계 등을 일본의 고전 및 고대사에서 재발견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사실관계보다는 ‘당위’에 ‘사실’을 짜내서 맞춘 ‘각색역사 dramatize history’다. 이후 ‘곳카신토’, 국가신도(國家神道)는 일본제국의 77년간을 상징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주장하는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역사적 견해, 즉, 일본제국 정부의 황국사관(皇國史觀) 정책에 의해 성립되었던 국가종교로의 국체신도(國體神道), 신사신도(神社神道)와 문제의 황국사관 연결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기까지 한다.

일본제국시대(日本帝國時代 1868년~1945년)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일본과 이웃국가를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 일본 황국사관

일본제국주의는 일본정부에 의한 일본식 정통역사관으로, 일본의 국정교과서에 황국사관을 전 일본국민에게 보급시켰다. 이 국정교과서는 진무 천황(神武天皇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재위 기원전 660년~기원전 585년)의 ‘진무텐노의 건국 신화’로 역사를 시작하고 천황의 생사에 따라 변경될 ‘연호’로 시대를 구분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천황의 사진인 어진영(御真影)이 배포되고 그것에 경례를 강요했다. 이 황국사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불경죄에 의해 체포됐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일본문부성은 ‘국체의 본의(國體の本義)’ ‘신민(臣民)의 길’이라고 하여 천황에 충성을 강요, 드디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황국사관의 현실체로 ‘만세돌격’인 자살특공대 ‘카미카제’를 만들어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 제국의 결사 특공대 이름을 ‘카미’는 일본어로 '신(神)'이라는 뜻이고, ‘카제"는 '바람(風)'이라는 뜻으로 ‘가미가제’까지 실행시켰다.

   
자살특공대 '카미가제' 출격을 환송하는 일본제국시대 여학생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자국인 포함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등 수천만 명을 죽음의 사지로 내몬 일본의 잔악성(殘惡性)은 ‘문명이 야만’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원래 야만과 살육의 파가 흘렀는데 ‘문명의 외피’를 걸쳤던 것인가? 

가혹(苛酷)했던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의 운명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鄭詔文 1918년~1989년)의 인생은 부친이 조선독립운동에 좌절한 뒤, 아는 사람을 믿고 일본 교토 ‘니시진(西陣)’까지 건너와서 특별고등경찰(特高警察)의 감시 하에서 일가가 직물을 배우는 일을 시작한 것은 이미 이 칼럼의 상편에서 서술하였다. 당시 정조문은 6살이었다. 이후 머슴으로 일을 한 것을 시작으로 빈곤과 민족적 차별의 일본 생활이 이어지는데, 훗날 정조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며 9살부터 다녔던 학교생활의 3년간이다. 「아야어여いろは」도 모르는 나는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고, 처음에는 학우들을 따라가느라 고생하였다. 겨우 1년이 지나 그 고생은 없어지기 시작했지만, 역사수업만큼 나를 괴롭힌 것은 없었다. ‘진구우코오고오(神功皇后)’의 신라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정벌, 그리고 조선병합, 역사에서는 언제나 조선은 약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요와무시 죠오센(弱虫朝鮮)’사관은 현실에서 사는 우리를 센진鮮人, 더러운 ‘여보きたないヨボ’등으로 부르며 업신여겼다. 수업이 끝나자 많은 못된 애들이 “조선 정벌이야!”라고 하면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세게 때렸다.”, “그 무렵부터 내 가슴에는 일본 역사에 대한 소박한 의문의 뿌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왜? 우리 조선은 늘 약할까?”

정조문의 이런 생각은 이후 사업을 시작하고 ‘조선도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거의 동시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사에 끈질긴 관심의 계기가 됐다. 또한 정조문은 젊은 시절에 ‘왜 조선인은 문화적인 면에서 늦었던가? 어째서 언제나 약한 조선이었던가?’라는 것을 고뇌하였다. 그리고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보다 냉정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돌파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따라서 재일동포가 차별받는다는 것에 반발심은 강했지만 저항하는 것은 감정적인 소모라고 정조문은 생각하였다. ‘차라리 그런 힘을 더욱 자국의 문화 예술이나 역사를 이해하는 쪽으로 쏟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계간지 창간 준비를 위하여 

정조문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구하여 각 지역에 전하는 고대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사카에 사는 친형인 정귀문(鄭貴文)은 오사카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형 정귀문은 몇 명의 재일 작가들과 함께 동인지 ‘조양朝陽’을 창간하였다.
 
형 정귀문과 도쿄에서 활동하는 재일작가 김달수(金達壽)가 교토에 놀러 오게 되었다. 화제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집중되는데, 어느덧 이야기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해서 함께 교토, 나라(奈良), 시가(滋賀) 등에 있는 조선계 신사(神社)와 사찰(寺刹)을 찾아다녔다. 확실한 자료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충 감각으로 찾아다니며 문헌 자료를 조사하는 중에 조선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역사적 윤곽이 천천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식이었다. 유적 답사는 정조문의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정조문, “내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풀다”

   
정조문(鄭詔文) 고려미술관 설립자와 전시장 전경. 사진=고려미술관
 
어느 날 정조문 일행인 재일작가 친형 정귀문, 또 다른 재일작가 김달수, 이렇게 세 사람은 큐슈(九州), 아리타(有田)를 찾아갔는데, 아리타의 중심에 있는 작은 산의 가장자리에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参平碑)가 있었다. 높이 4~5m. 산 아래에서도 볼 수 있고, 또 근처 묘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정조문은 ‘역사와 인물’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유적 답사는 내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규슈(九州)의 사가현(佐賀県) 아리타(有田)를 방문했을 때 일이었다. 아리타야키의 중심지와 도자 미술관을 찾아간 뒤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도오잔진자(陶山神社)로 향하였다. 아리타야키(有田焼) 이전의 일본 도자기라하면 흙을 반죽하여 저화도로 구워진 도기인데, 이삼평은 백자 원료를 찾아내 1,300도의 온도로 등요(登窯)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그 아름다운 일상용기가 이마리(伊万里)항구에서 일본 각지로 운반되어 소위 이마리야키(伊万里焼)로서 전국으로 또는 18~19세기의 유럽까지 수출되어 이름을 떨쳤다. 창시자 이삼평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 도오잔진자이며 「陶祖李参平碑」 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정조문이 친형 정귀문, 재일작가 김달수, 재일사학자 이진희, 소설가 시바료타로 등, 일본 지식인 등과 현지 답사하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의해 이삼평을 비롯하여 수많은 장인과 기술자들이 조선에서 납치되었는데, 타국에서 그들의 삶이나 운명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였다.
(역사와 인물 152호, 1983)

조선도자(朝鮮陶瓷)의 독특함은 일상성에 있다

정조문이 쓴 글이다.

“조선 도자기에는 중국 도자기처럼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는 복잡한 조형미가 많지 않다. 원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 것들이 많아 이렇게 진열대 속에 놓인 모습이 은근히 불편해 보인다. 그래서 생활 속으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 적지 않다. 거기에 우리 도자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하얀색을 선호한 조선인의 미의식이 만들어낸 가장 소박한 아름다움의 극치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그리워하고 만나는 즐거움으로 사는 보람을 느낀다“ (나의 고미술 산책, 일본 속의 조선 문화 18호, 1973)

“일본 근세 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 침략으로 끌려온 조선인 장인들에 의해 비로소 자기를 만드는 길이 열렸으며, 도기의 역사를 크게 바꾸게 되었는데, 오키나와의 쓰보야야키((壺屋燒)도 예외는 아니다. 사쓰마의 다이묘(大名)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善弘)’가 납치한 장인 84명에 의해 ‘나에시로 가와야키(苗代川焼)’나 ‘류우몬지야키(龍門寺焼)’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쓰마야키(薩摩焼)’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 장씨와 안씨 두 사람은 류큐(琉球 오키나와)로 보내졌다. 쓰보야야키는 장헌공(張献功)에 의해 시작되었다. 흙은 까맣고 조금 차이는 있으나 구워서 만드는 방법 등은 옛날 그대로라고 하며, 갈색이나 녹갈색 유약을 입힌 매끄러운 생활품은 ‘사쓰마야키’풍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나하시(那覇市)는 전쟁 말기에 폐허가 되었으나 쓰보야 일대만은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한다”

“쓰보야의 역사는 200년이에요”라고 오키나와 도요관계자는 말하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 그리고 류우몬지(龍門寺)에서 조선식 등요(登窯)의 불이 이어져 오는 것처럼, 산의 경사면을 이용한 쓰보야의 가마에서도 연기가 계속 오르고 있었다. 험한 역사의 흐름 속에 조선의 불은 오키나와 남도의 풍토에 녹아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향수(鄕愁)와 비슷한 그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고미술 산책, 일본 속의 조선 문화 22호, 1974)

“조선 회화와 비교하면 조선 도자기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다인(茶人)들에 있어서 는 다완(茶碗)이, 수집가들에게는 항아리가 애착의 대상이다. 옛 조선인들이 일상 생활의 필수품으로 사용한 것, 막걸리나 밥을 담은 그릇 등이 유리장 안에서 뽐내는 것은 묘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선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나는 자주 조선 문화 유적을 찾으러 여행을 다닌다. 우선 목적지의 교육위원회에서 자료를 얻어 민예자료관이나 고고박물관을 찾아간다. 그 지역의 특색이나 고대 문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위로 지금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 생활에 과거 조선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에다 마사아끼(上田 正昭)’ 교토대학 명예교수를 만나다

“우리만 이렇게 찾아봐도 소용없으니, 일본 학자들과 상의하고 관련 책을 한 권이라도 내보자”는 결론을 내면서 처음 찾아간 사람이 교토대학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현 고려미술관장)였다.

   
교토 고려미술관 관장, 교토대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上田正昭)
 
그를 찾은 이유가 그의 저서 ‘귀화인帰化人’(中公新書, 1965)을 모두 읽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는 교토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청년 역사학자였다. 일본에서 최고의 대학인 교토대학 교수가 일본과 한국 역사의 근본을 뒤집는 논리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호적제도나 나라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조선반도에 서 온 사람을 귀화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지키古事記’에는 도래(渡來)라고 확실히 나와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귀화인이라 하는 것은 틀렸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적으로 호적을 만들어야하고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야한다. 그런 것을 법률로 확실하게 정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아니다. 고대 국가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은 시기에 귀화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귀화하는 자리가 없는데 왜?”
 
많은 일본의 학자들은 이런 모순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글로 쓰는 것은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요컨대 학회에서 배척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문의 협력자,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
 
정조문과 김달수는 힘 있는 아군을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조선대학의 교수였던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도 비공식적으로 합류하였고, ‘일본 속의 조선 문화’가 드디어 잡지로의 간행계획과 윤곽을 잡았다. ‘우에다’교수와 만난 정조문은 형 정귀문이 살던 동네에서 함께 산책하는 사이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한테도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같이 나누게 된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 발족을 위한 준비가 그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정조문 발간의 계간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 편집방침

정조문은 “일본 고대사와 조선과의 관계를 빼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곧 잡지 창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일본의 역사는 일본인의 손으로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가 된다는 것을 정조문은 구성원들과 확인하였다.

“일본인 학자가 5명인데 조선인도 같은 인원수로 진행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사실 상호 평등한 일이지만, 같은 인원이면 조선인의 소리가 더 커지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재미가 없으니 2:8, 3:7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0호로 휴간할 때까지 그 체제를 유지했다.”

“비뚤어진 고대 한일관계사를 바로 잡는 이 기획에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 선생, 우에다 마사아끼 선생이 참여하고 재일작가 김달수와 함께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제 1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것은 1969년 3월의 일이었다.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선생으로부터 열의 있는 협력을 얻고, 다른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각지 향토사 연구자의 귀중한 연구논문 등을 실어서 비뚤어진 고대 한일관계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말하자면 일본인 학자와 조선인 학자의 공동연구 자리이며, 양국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한일 역사학은 물론, 조선 고대 불교학, 민속학, 풍속학, 고대 언어학 등 많은 효과가 있기를 믿는다.

   
정조문이 친형 정귀문, 재일작가 김달수, 재일사학자 이진희, 소설가 시바료타로 등, 일본 지식인 등과 회합사진.
 
나는 한일관계사를 읽을 때 이런 국제적인 공동 작업이 좋은 결과를 내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공동연구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가능하면 더 넓은 연구의 자리로서 또는 해외에 사는 동포들이 남북 좌우의 갈림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당으로서 도서자료실이나 고미술연구를 위한 문화강좌, 고려미술자료관과 같은 시설을 어떻게든 실현하고 싶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복간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지만, 또 망향의 염원에 휩싸이면서 제 2의 삶을 살아온 교토의 모서리에 고려미술관을 세우는 것, 그것도 내 생애의 꿈이다” (‘역사와 인물’ 152호, 1983)

드디어 정조문은 당시의 쟁쟁한 지식인들과 일본학자들을 끌어들여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잡지는 곧 일본 속에 조선의 고대사에 대한 일대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후 잡지 발행은 1969년부터 1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귀화인(歸化人)이란 말을 도래인(渡來人)으로 새로 불리게 하다

정조문의 글을 인용한다.

정조문은 남긴 글에서 “귀화인歸化人이란 말은 도래인渡來人으로 새로 불리게 되어 현재 이것도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연을 봐도 일본 국내에서는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애매하게 인식이 되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한일관계사, 고대사를 풀어볼 때 국제적인 공동 작업으로 적절히 여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반복하며 재검토해 나감으로써 올바른 관계사, 우호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지지 않을까. 이런 사실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면 침략이거나 대항운동이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음 세대가 오해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한다. 고대사라 하는 것은 거듭 발굴하며 검토를 해야 양국, 양 국민의 우호 증진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 조건이 마련된다면 다시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 작업을 해내고 싶다” (동양경제일보, 1982. 9. 24)

“일본 각지에는 훌륭한 공·사립미술관과 박물관이 많다. 전통을 살리며 문화를 키워 꽃피우는 노력을 볼 수 있고, 외국의 문화유산도 소중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문화는 어떨까? 수 년 전에 우에노(上野)의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 동양관 3층에 조선미술을 상설하는 전시실이 생겼고, 코마바(駒場)의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에서도 상설되어 있으나 독립된 조선미술관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회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목공예품 등 만들어진 유물에 대해서는 자애롭게 존중히 여기면서 그 배경이 된 풍토나 인간이 있었음은 전혀 기억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축적되면서 ‘일본 속의 조선 문화’라는 작은 계간지가 탄생하였는데, 오늘까지 5년간의 세월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무거운 시간이었다. 중국이나 유럽의 미술품, 고고유물에 비해 질과 양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조선의 문화유산에는 정당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서 서운하고 안타까워, 나는 언젠가 그 자리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외곬으로만 생각하면 그 일에 자신을 거는 성질인 것 같아서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라도 매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나라 학자가 함께 학설을 이룩할 때 어떤 효과가 있는가. 예컨대 30호는 ‘이즈모와 조선(出雲と朝鮮)’이란 제목으로 간담회를 했는데 고대사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일본의 도기(陶器)인 ‘수에키(須恵器)’,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 논의를 펼치면서 김달수는 “철은 조선말로 ‘쇠’라 한다. 이것은 일본말로는 발음을 못한다. 마침 토론 자리에 있던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学) 명예교수인 고고학자 ‘모리 코이치(森 浩一)’가. ”김달수 씨, 다시 한 번 말해 달라”

모리 교수는 무릎을 치고 “수에키의 유래는 바로 이것이다”고 말했다.

즉, ‘수에키’는 “철과 같이 딱딱하여 두들기면 금속 소리가 나는 의성어(擬聲語)인 것이다. ‘수에키’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이러한 기물이 없었으니 일본 말로 ‘수에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설은 현재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조총련의 방해

이 칼럼의 상편에서 얘기했듯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최대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국애의 열정이나 신념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 조짐은 이미 있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압력이 왔다. 이미 창간호가 발행된 시점에 정조문은 조총련의 교토본부에 재차 불려 갔다. 친형 정귀문은 1976년 ‘사상과 과학(思想と과학)’ 3월호에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여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73년 2월 일본 도쿄 중앙공론사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격려하는 모임에서 축사를 하는 소설가 '시바료타로'와 정조문 고려미술관 설립자와 부인 오련순여사
 
“창간에 즈음하여 우리는 각각 마음을 정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외부의 간섭, 압력을 거부하고, 굴하지 않는다는 맹서(盟誓)를 했었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조총련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전례가 있었다. 김달수는 저서나 잡지에서 그런 경험을 겪었다. 한번은 김달수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 교토부가 주최한 시민강좌에서 고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강연을 의뢰받았다. 그런데 교토 조총련은 교토부에 김달수를 강사에서 제외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압력을 받고 교토부는 단념하고 말았다. 나도 1963년 도쿄에서 작은 잡지를 발행한 적이 있었다. 역시 창간호 단계에서 압력을 받았고, 2호를 끝으로 폐간한 경험이 있다. 정조문은 때때로 조총련의 교토부 본부에 불려 갔는데 부본부의 간부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한다. 또한 잡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조선문화사에 모인 우리들은 조총련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명령했던 것일 것이다. 조총련강령에는 언론, 출판 등의 자유가 옹호되어 있으니 그것을 방패삼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정조문의 ‘민족문화운동’을 위한 정치투쟁은 곧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조문은 어떤 유형의 정치회의든 정치모임이나 집회에는 참여하는 것을 피했다.

“지금 상태로 재일동포가 ‘조국론’을 전개하기에는 아직 사상적 기반인 문화적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일감정이나 조국애만으로 펼칠 수 없는 많은 일을 정조문은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문의 민족의식은 ‘조선백자’에서 고대사를 바로 잡는 것으로부터 눈 떠

친형 정귀문의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여담’을 다시 인용한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한 개의 조선백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잡지의 편집 발행인 정조문이 어느 분으로부터 백자 항아리를 양도받은 날로부터 이미 시작 된 것이다. 1960년대 초 이전부터 정조문은 작가 김달수, 고고학자 이진희와 교류가 있었다. 조선의 고미술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던 정조문에게 그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와의 만남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자 항아리는 곧 조국과의 만남을 상징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이면 그 백자 항아리를 마주하곤 했다. 미술적 감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릴 적 고국에서의 생활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아리는 우연히 만난 듯한 친근감을 주었다. 돌고 돌아 지금 여기에 있는 항아리의 운명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아직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 발상은 없었으나 김달수가 조선 유적을 찾아 간사이(關西)지방에 오던 시기였다. 나와 정조문도 동행하였다. 우리는 김달수에 의해 일본에서 보이는 조선 문화 유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혹은 구할 수 있는 도자기도 일본 속의 조선 문화이지만, 신사나 그 신(神)들, 사찰이나 그 불상도 또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고려청자라든가 조선백자 등에 대한 가치는 매우 높아 상상 이상의 것이다. 청자와 백자 대부분은 일본이 조선식민지시대에 취득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제 2호 좌담회 <속續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에 참석했던 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는 이런 발언을 하였다.

“고대 한일관계를 이야기할 때는 잘못된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의 문제로서 사실에 근거하여 그 교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쓰이지 않은 역사, 파묻힌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 그것은 지배자 측에서는 불가능하고, 민중 측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정조문은 남긴 글에서, “조선 또는 그 문화는 일본 고대사의 일부분 내지는 미세한 것으로 해서 취급돼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조선 문화를 축으로 해서 발언 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역사학계나 문화계가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고대문화 성립과 발전을 일본 열도 내의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동아시아사의 전개 속에서 일본 고대사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화려한 타카마쓰즈카((高松) 벽화고분의 출현으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야마토(大和)라는 일본의 야마토 중심주의는 ‘일본서기’가 그리는 역사상에 근거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대륙팽창정책, 식민지주의적 역사관의 중핵에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등 비뚤어진 조선관이 있었다”

정조문, 역사의 모순을 역사로 아는 일본인들을 일깨우다. 

정조문은 일본의 고대 유적지 순례 중, 지방의 학자, 신자, 사찰의 신관이나 주지 스님들을 정조문은 많이 만나 보았다.

“그들은 역사의 모순을 이야기하였다. 혹은 신들의 유래에 관해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런데 잡지게재를 위해 글을 의뢰하고, 원고를 받아보면 지금까지의 역사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인의 ‘역사 체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권위’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들은 신들의 모습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신들은 원래 인간이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먼 조상이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역사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라고 하는 이상한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창간호 원고에서부터 난관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열정만으로 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간호 좌담회는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이상의 출석자도 있었다. 우에다 마사아끼, 시바 료타로, 무라이 야스히코, 그리고 김달수였다. 말하자면 미래가 불투명한 잡지에 일본의 유명한 인사가 참가했던 것이다. 행운이었다.”

   
정조문 발행의 '일본속의 조선문화' 1권/50권 표지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의기투합할 수 있는 일본의 학자는 많지만, 활자로 남겨야 하는 일이 되면 자신의 책임감으로 지금까지의 학설을 강하게 누르는 학자의 자세에 정조문은 일본과 한반도 역사적 재구축의 벽을 두껍게 느꼈을 것이다.

교토명에교수이자 현 고려미술관 관장인 ‘우에다 마사아끼’는 ‘강좌, 인권 관계의 땅을 찾아서’ (공익재단법인 세계인권문제 연구센터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내가 저술한 1965년 6월에 출판된 ‘귀화인’이라는 책을 시바 료타로, 정조문 형제 그리고 작가 김달수씨가 읽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였던지 정씨 형제와 김달수씨, 이진희씨가 1965년 8월에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 大學)의 하계 강좌에 내 강의를 들으러 왔습니다. 나는 물론 그곳에서 명함을 교환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모두 ‘귀화인’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8년 9월에 시바 료타로와 제가 조선문화사의 고문이 되었습니다”

계간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고대의 조선 문화를 축으로 고대 일본을 보고자 했다.

이 계간 잡지는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73년 2월에 ‘시바 료타로’와 ‘우에다 마사아끼’, 김달수의 요청으로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격려하는 모임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중앙공론사 빌딩 대회장이 모임장소였는데, ‘와카모리 타로(和歌 森太郎)’, ‘다니가 와 데쓰조(谷川 徹三)’,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 ‘타케우치 요시미(竹 内好)’, ‘이노우에 미쓰사(井上 光貞)’, ‘나카노 시게하루(中野 重治)’, ‘오카모토  타로(岡本 太郎)’, ‘진순신(陳舜臣)’, ‘아리요시 사와코(有吉 佐和子)’ 등 문인과 학자, 기자들 18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있었던 격려사나 축사는 의미가 깊었다. 그 중 중국 학자인 ‘타케우치 요시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 잡지가 처음에는 취미잡지인가 생각해서 그저 가볍게 보려고 했습니다만, 점점 그렇지 않고 이것은 일본에서 가장 혁신적인 잡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 자신이 작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말로 혁명적인 잡지를 만들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요즈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계속해 주시고 한 권, 한 권이 언제 끝나더라도 이 잡지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격려회’는 상상 이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초등학교 3년의 학력이 전부인 정조문이 단상에 올라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 작가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광고가 단 한 줄도 없어야 한다.

아들 정희두(鄭喜斗, 현 고려미술관 상무이사)의 증언이 있다. 정조문이 가족 앞에서 절대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면서 아들은 말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광고가 하나도 없다. 단 한 줄도 없다. 물론 타사광고에 실린 적도 없다. 왜냐하면, 광고를 싣게 되면 잡지가 퇴색하게 된다. 북측의 기업 광고가 게재되면 이 잡지는 북측 계통의 읽을거리가 되고, 남측의 기업광고가 실리면 남측의 잡지가 된다. 그리고 일본 기업은 당치도 않은 것이야.”

이런 정조문의 사고방식은 후에 고려미술관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하편으로 이어짐)

[참고, 인용도서(參考, 引用圖書)]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재일동포의 삶과 조국애’
編著 정조문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초대 이사장)
     정희두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상무이사)
編譯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이수혜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학예연구원)
     김희경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실장)
     손은미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어 해설사
     강미정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간사)
펴낸이 이화표
편  집 윤민지
펴낸곳 도서출판 ‘다연’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