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를 봐도 이해 안 되는 몇 가지
블랙박스를 봐도 이해 안 되는 몇 가지
[서평]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 / 김인성 외 지음 / 들녘 펴냄

“우리가 다수파인데, 다수파가 선거부정을 저지를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 2일, 당권파로 분류되는 이상규 통합진보당 의원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몇 차례나 이점을 강조했다. 즉 당권파는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자꾸 통합진보당 사태의 책임이 당권파에 몰리고 있다는 항변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당권파 세력을 쳐 내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일이며, 당권파는 그 피해자라는 것이 그의 설명의 요지다.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2차 진상조사 당시 선거 시스템 로그파일 분석을 의뢰받은 김인성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도 같은 말을 했다. “이 사건은 뺑소니 가해자가 피해자가 뒤바뀐 사건”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고, “지역 건축업자가 자기 이권 챙겨줄 국회의원을 만드려다 실패한 것”이라는게 김 교수의 결론이다. 단순화시키면 가해자는 참여계, 그리고 그 죄를 덮어쓴 것은 당권파 측이다.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는 여기서 시작해 여기서 끝낸다. 당권파의 항변서이자 호소문이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불거진 이후 가해자의 오물을 뒤집어썼고, 보수언론은 물론 진보언론과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속된 말로 ‘조리돌림’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김인성 보고서’다. 김 교수는 책이 기획된 이후 스스로 참여의사를 밝혀 글을 넘겼고, 이는 책의 맨 앞장에 수록됐다. 그렇게 이 책은 ‘근거’와 ‘주장’ 두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근거 부분, 김인성 교수는 ‘조준호 진상보고서’와 ‘2차 진상보고서’가 “근거 없다”고 주장한다. ‘디지털 포렌식’ 방식으로 이루어진 김인성의 진상조사 결과 부정부실의 대부분은 오옥만 측에서 발생했고, 김 교수는 원래의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 ‘당권파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분노했다. 진상조사는 “파행적”이었고, 그 결과 누명을 쓴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 전문가의 분석인 만큼, 그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 신뢰해야 한다. 문제는 바로 이 ‘디지털 포렌식’이란 용어다. 2차 진상조사단은 로그파일 분석을 의뢰했고, 김 교수는 이 과정에 대해 “재판으로 치면 저희는 감정인이다. 판사가 촉탁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김 교수의 감정기준이 다소 자의적이라는 문제가 있다.

선거 시스템 로그파일은 몇 가지 부정·부실선거 정황 중 하나인데, 김 교수는 이에 대한 분석결과 가해자와 피해자를 정확히 지목한다. 2차 진상조사위원회는 김 교수에게 IP 5회 이상 중복투표에 대한 데이터를 요구했지만, 김 교수는 자의적으로 30회로 기준을 조정했다.

김 교수가 책에서 문제형태로 낸 분석결과에도 이 같은 점이 포함되어 있어 약간의 의문을 준다. 문제 9에서 당직자들이 수시로 미투표자를 확인했던 행동에 대해 “부정의 증거가 없으니 통상업무”라고 결론지었고, 문제 11에서 “소스파일 조작 정황에 대해서는 투표 전후 (각 후보의) 투표 경황이 비슷함으로 부정으로 보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문제 14에서 온라인 선거의 경우 “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 16에서 김 교수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당직자들이 투표 현황 페이지를 보거나, 최고 관리자 아이디로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없다’고 단정한다. “정황만 있고 명확한 증거는 없으니 부정행위 사실이 없다”는 논리다. ‘부실은 있고 부정은 없다’는 것, 부정정황은 선거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불명확하다. 하지만, 증거를 찾아야 하는 전문가 입장에서 충분히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반면 오옥만 후보 측의 부정논란을 찾아내는 과정은 다르다. 제주도의 M 건설업체에서 오옥만 후보에게 집중 투표한 정황이 발견되었는데,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노조 사무실이 아닌데 몰표가 행해졌고, 공식 현장투표소가 아님에도 투표소에만 쓸 수 있는 지역관리자 아이디로 로그인했다”며 이곳을 “불법 콜센터”로 단정지었다. 물론 이 역시 부정투표의 심각한 정황이나, 김 교수는 이번에는 “부정”으로 지목했다. “불법조회 이후 투표한 사용자가 731명이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불법 콜센터 투표 권유를 받고 투표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IP에서 행한 271건의 온라인 투표는 투표자가 이 장소에 왔었다는 것이 소명되지 않는 한 전부 대리투표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부분은 김 교수의 판단이다.

이후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장, 즉 당권파를 위한 항변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히 판단할 내용은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이 억울할 수도 있는 노릇이고, 어찌됐건 이 사태로 인해 한 명의 소중한 생명이 죽었다는 울분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역시 ‘총체적 부실 부정’의 당사자인 신당권파가 혁신의 책임을 온전히 구당권파에만 씌웠다는 억울함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온전한 피해자”, “우리 편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식의 표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이 ‘무죄’의 근거로 사용하는 김인성 보고서에 대한 의아함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당권파 측이 주장해 온 ‘자기편은 자기를 비판하면 안 된다’, ‘조중동의 먹잇감’이란 논리는 위험할 정도다. 진영논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종북’ 때문이라는 진단은, 프레임 자체가 논쟁거리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있다. 사상의 자유를 바탕으로 국민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결론적으로, 이번 책은 구당권파와 신당권파의 화학적 결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태 인식과 사태를 푸는 방식, 양 측의 입장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속칭 당권파 역시 진보정치의 한 역사이고 자산이다. 솔직함과 냉정함, 진보의 혁신에 가장 중요한 가치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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