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권이 연말 차기지도부 구성을 앞두고 술렁이고 있다.

2012년 중국정치권의 대격변은 무엇보다 태자당(太子黨,고위층 자녀)출신 보시라이(薄熙來,63) 전충칭(重慶)시 서기의 실각이다. 오는 10월 1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유력했던 그는 전인대폐막 다음날인 3월15일 중앙당에서 일체의 관직을 박탈당하고 전격 해임된 뒤 현재 심각한 당기율위반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보시라이는 중국최고 권력자들에 대한 도청과 군대동원 등 쿠데타가 사전 적발된 것으로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또한 보시리아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52)는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41) 살인혐의로 수감돼 사법기관의 판결을 앞두고 있다. 보시라이 부부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반면 같은 태자당출신인 시진핑(習近平,59) 중국국가 부주석은 10월 중국내 최고권력인 차기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직을 향해 순항을 계속중이다.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50)은 5월 14일 인민해방군 산하 예술학원 원장(대학 총장)에 내정됐다. 예비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격에 맞는 자리로 이동했다는 분석이다.
 

시진핑 부부와 보시라이 부부는 극명하게 대조적인 인생 후반부를 맞고 있다. 같은 태자당 출신으로 인생을 출발했던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삶의 역정과 정치스타일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중국판 정치세계에서 시진핑은 승리했고 보시라이는 실패했다.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성찰은 중국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두 부부의 공통점은 이혼뒤 재혼…첫 결혼은 모두 화려한 ‘가문의 결합’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모두 이혼뒤 재혼의 과정을 겪었다. 시진핑의 첫 부인은 중국공산당 외교관인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이다. 둘의 인연은 양가 부친들의 각별한 친분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졌다. 소위 가문끼리의 정략결혼이었다.

시의 첫 장인이었던 커화는 국공내전 시기에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의 부하로 활약했으며 건국 이후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시중쉰은 정치실권자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커화를 소개할 정도로 둘은 친밀했다. 커화는 1980-1990년 중국과 영국 사이의 홍콩 반환교섭을 담당한 책임자중의 한명이었다. 또 아시아 국장과 아프리카 국장, 캐나다 대사, 필리핀 대사 등을 역임했다.

시진핑과 커링링은 1980년쯤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둘은 몇 년 못가 헤어진다. 이혼 사유는 외교관의 딸로 외국생활에 익숙했던 커링링이 당시 지방간부에 불과했던 시진핑과의 따분한 신혼생활에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커링링은 이후 영국 유학을 갔으며 둘은 갈라서게 된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다.

반면 보시라이는 27살이던 1976년 베이징시 서기를 지낸 리쉐펑(李雪峰)의 딸 리단위(李丹宇)와 결혼해 아들 보왕즈(34,薄望知. 이후 리왕즈로 개명)를 뒀다. 보시라이도 첫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보시라이는 리단위와 최고법원까지 가는 4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이혼했다.

리는 보에 대한 불만으로 그뒤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인 리씨로 바꿨다. 리왕즈는 베이징대 법대를 졸업한뒤 2003년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씨티그룹에서 일했다. 씨티그룹을 떠난뒤 사모펀드에서 경력을 쌓기도 했다. 리왕즈는 “아버지의 덕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리왕즈는 2011년에 1990년대 보시라이가 시장을 지낸 다롄(大連)에서 투자자문업무를 맡기도 했다.

공교롭게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부친도 재혼했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은 저우언라이의 심복으로 당 중앙선전부장과 부총리까지 지냈다.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셋(1남2녀), 둘째 부인 치신(齊心)과는 시진핑을 포함해 넷을 낳았다. 시는 위로 누나 둘을 뒀다.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는 비서 출신의 후밍(胡明)과 재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 보시라이다. 보이보는 중국 공산당 ‘8대원로’중 한명이며 부총리를 지냈다. 그는 중공 화베이(華北)국 제1서기로 큰 공을 세웠고 부총리까지 지냈다.

시진핑의 계급을 초월한 용감한 사랑…보시라이는 대학후배이자 ‘장군의 딸’과 재혼

시진핑은 국무원판공청,중앙군사위판공청 비서(1979-1982)와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서기(1982-1985), 푸젠(福建)성 샤먼(厦門)시 부시장(1985-1988)을 거쳤다.

시진핑이 두번째 부인 펑리위안과의 첫 만남은 1986년 말이었다. 시가 샤먼시 부시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홀로 된 뒤 3년이 됐고 외로움을 느낄 때였다. 시가 당시 정식이혼은 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때 전처 커링링은 영국에서 유학중이었다.

둘의 만남은 펑리위안 친구의 소개로 이뤄졌다. 펑리위안도 당시 25살로 국내의 이미자와 같은 유명한 민족음악(성악풍 고음창법) 스타급 국민 가수였다. 시진핑과는 9살차였다. 당시 인민해방군 전속 유명 가수로 활동하던 펑리위안은 같은 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소속인 유부남과 결혼하려다 어긋나 실연중으로 울적한 마음이었다.

시와 펑은 서로가 한눈에 반해 결혼을 약속한다. 시는 펑의 개방적인 성격과 미모에 반했고 펑은 시의 소탈함과 진지함에 반했다. 그런데 펑리위안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 시의 집안이 고위간부인데 비해 펑의 집안은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펑의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산둥(山東)성 작은 현의 문화관장으로 하급간부에 불과했다. 양가의 격이 맞지 않았고 부모마음에 딸이 고생할 것이 걱정됐다. 당시 최고간부의 집안 자식들은 방탕하고 돈을 함부로 쓴다는 선입관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와 펑은 부모몰래 비밀결혼을 감행한다. 펑이 비행기로 베이징에서 내려왔고 시는 1987년 9월 1일 오후 7시에 거행되는 결혼식을 샤먼시장과 시간부들에게 알렸다. 또 결혼수속도 하룻만에 끝냈다. 시진핑은 신부가 누구인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시의 간부들이 결혼식장에 도착한 뒤에서야 신부가 유명스타 펑리위안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출처=시진핑(소마 마사루 지음, 한국경제신문 출판)>

시와 펑 사이에는 딸 시밍저(19,習明澤)가 미국 하버드대 2학년에 재학중이다.

보시라이는 35살인 1984년에 구카이라이와 재혼한다. 구카이라이는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부주임(소장)을 지낸 구징성(谷景生)장군의 5녀중 막내딸이었다. 또한 베이징대 역사과를 나온 보시라이와 같은 베이징대 법대출신으로 가문과 학벌에서 서로 균형이 맞았다. 둘의 첫만남은 1984년에 이뤄졌다. 당시 보시라이는 다롄(大連)시 진(金)현 서기로 있었다.

구는 보시라이의 초청으로 중앙미술원의 푸톈처우(傅天仇) 교수가 현지 환경예술 답사를 할 때 동행하게 되면서 첫 만남이 이뤄졌다. 구는 당시 보가 황량한 농어촌에 환경예술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극단적 이상주의자인 아버지 구징성과 너무 비슷했다고 한다. 보가 사는 집은 청소를 해도 영원히 깨끗해지지 않을 것같이 지저분했는데 책상 밑의 찢어진 종이상자에서 사과를 꺼내 손님을 대접했다. 구의 눈에 보는 소설속의 인물로 비쳐졌다. 그러나 능력과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 보였다고 한다. 구는 당시 미국대학 입학에 장학금을 받기로 결정난 상태였다. 그러나 보를 만난 뒤 유학을 가지않고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보시라이는 야무지고 예쁜 인상의 구카이라이를 멀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시라이가 베이징대에 다닐 때 구카이라이와 사귀면서 전처와 헤어졌다는 설도 있다.

보와 구 사이에는 아들 보과과(25,薄瓜瓜)를 두었다. 보과과는 영국 옥스포드대를 거쳐 현재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재학중이다. 준수한 용모에 보시라이를 닮은 개방적인 성격으로 젊은 여성들과 밀착해서 찍은 사진들과 미모의 두 젊은 여성을 옆에 끼고 넥타이가 풀린 모습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자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실제 옥스포드대에서는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즉 시진핑은 딸 한명을 두었고 보시라이는 아들 둘을 둔 셈이다.

펑리위안의 군인맥은 시진핑에 결정적 도움…구카이라이의 살인 혐의는 보에 ‘독약’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어쩌면 부인 때문에 천당과 지옥으로 길이 엇갈렸다고 할 수 있다.

펑리위안은 시진핑이 최고권력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를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펑은 1962년 산둥(山東)성 윈청(鄆城)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현(縣)극단소속 가수였다. 어릴 때부터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며 어머니가 즐겨부르는 화무란(花木蘭)을 흉내내 불렀다. 대주주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문혁때 29살임에도 무대에서 쫓겨났다.

펑은 생활이 힘들었지만 노래 배우기를 즐겼고 소질을 인정받아 1976년 산둥(山東)예술학교에 최고 성적으로 입학한다. 그곳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18살 때 인민해방군 위문공연단인 전위가무단(戰衛歌舞團)에 들어가 베트남전 등 최전선을 다니며 노래인생을 시작한다.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스무살이던 1982년 ‘희망의 들판에 서서’(在希望的田野上)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현재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 예술책임자로 현역장성(소장)이다. 2008년 쓰촨(四川)성 대지진때 특별공연을 펼치고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에이즈 결핵예방 친선대사를 맡아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실제 시진핑은 차기지도자로 내정된 2007년까지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불릴 정도로 스타인 부인의 명성에 가려있었다. 국민적 스타인 펑리위안은 중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펑의 인민해방군내 인맥은 앞으로 시진핑이 군을 장악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펑은 상하이방인 쩡칭훙(曾慶紅)의 동생 쩡칭화이(曾慶淮)를 통해 장쩌민(江澤民)과도 정치적 인맥이 연결돼 남편의 관운을 도왔다.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는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했다. 그러나 문화혁명때 부모가 압송되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 4명의 언니들이 모두 농촌에서 초등학교도 졸업못했다. 구카이라이는 할 수 없이 미장이집에서 일을 돕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잘라 팔았다. 그뒤 생계를 위해 비파를 배웠는데 연주솜씨가 뛰어났다. 영화 ‘마오주석 서거하시다’(毛主席逝世)란 영화속 음악은 구카이라이가 연주 녹음한 것이다.

1977년 가오카오(高考,대학 수능시험)가 부활되어서 다음해 베이징대에 들어갔다. 불우했던 어린시절 수학을 배우지 못해 거의 백지를 냈지만 문학답안지는 뛰어나서 베이징대 법대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막내딸의 이름을 카이라이(開來)로 지은 것은 어릴 때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앞날이 정의와 행복으로 활짝 열려있으라는 의미였다.

처음 지을 당시의 이름은 카이라이(開萊)였으나 보시라이(薄熙來)와 결혼한 뒤 남편 이름의 끝글자와 같게 맞추자는 거듭된 요구로 라이(萊)에서 초두머리(艹)를 떼고 라이(來)로 바꿨다고 한다. 최근 외신보도에서 보시라이와의 10년 별거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매체에서는 아들 보과과와 셋이서 단란하게 찍은 사진이 게재되는 등 가정불화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구카이라이는 1997년 미국 기업에 100만달러를 배상하게 된 중국기업측의 변호를 맡아 1심을 뒤집으며 승소하고 국내출판소송도 이기면서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또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따고 베이징의 카이라이법률사무소 소장으로 활동했다. 남편인 보시라이는 충칭시 서기로 범죄를 소탕할 때 구의 법률지식이 매우 도움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결국 화근은 돈이었다. 2011년 11월 평소 알고 지내던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와 경제적인 갈등이 격화돼 살인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이 불거지자 보시라이의 심복인 왕리쥔(52,王立軍)이 2012년 2월 청두(城都)주재 미 총영사관으로 진입하면서 보시라이는 회복불가능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8.1초등학교 동문…시진핑은 신중형, 보시라이는 추진형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모두 영도급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는 8.1초등학교를 나왔다. 이 학교는 인민해방군 창설일을 기념해 설립됐다. 태자당 자녀들은 대부분 이 학교 출신들이다.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과 같은 칭화대(淸華大) 화공과 출신으로 대학졸업뒤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을 거쳐 푸젠(福建)성 서기, 저장(浙江)성 서기, 상하이(上海)시 서기 등 개방된 연안지역에서 행정경험을 착실히 쌓았다. 업무스타일은 신중형이다.

저장성에서는 수질오염으로 농민폭동이 일어났지만 신속하게 대책을 마련해 수습했고, 푸젠성에서는 신중국 역사상 최대의 뇌물사건이 일어났으나 사건 처리 과정에서 청렴결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인관계가 원만한 후덕한 인상으로 후진타오의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과 장쩌민의 상하이방 양쪽에서 지지를 받는 이유다.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대범한 성품을 갖고 있다는 평이다. 특히 시진핑은 상하이방이고 같은 태자당 출신이면서 어릴 때부터 각별한 친분인 쩡칭훙(曾慶紅)의 전폭적인 지원과 희생으로 최고권력자의 문턱에 다가섰다.

   
 
 

보시라이는 베이징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업무스타일은 추진형이다. 다롄(大連)시 서기와시장, 랴오닝(遼寧)성 성장, 상무부부장과 충칭(重慶)시 서기 등 요직을 거쳤다. 특히 충칭시 서기로 있을 당시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문혁당시의 혁명가요인 훙거(紅歌) 부르기를 권장하면서 문화대혁명의 부활이라는 우려와 반격을 받았다.

지한파인 그는 기존 가로수를 뽑아내고 한국처럼 은행나무로 바꿨다. 또 저렴한 아파트 공급과 치안 및 범죄예방을 위해 시내에 500개의 초소 설치 등 과도한 재정투입으로 급격한 ‘충칭식 성장모델’을 추진해 잡음이 일었다. 이는 안정지향적인 전현직 정치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훤칠한 키와 서글서글한 인상에 화려한 제스처와 화법으로 외신기자들로부터 ‘중국의 케네디’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중국정치권내의 복잡한 권력투쟁과 부인의 살인, 심복의 배신 등으로 불행하게 정치인생을 마감하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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