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21일 오전 2시 둥후빈관을 출발해 비행장에 도착한 뒤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 비행기 탑승을 꺼리는 마오가 이날 비행기를 탄 것은 1958년 이후 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일 상하이에 도착한 마오는 24일 밤 수행한 양청우(楊成武 양성무)와 우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양청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476)

“자네는 과거에 천자이타오(陳再道 진재도)를 알았나? 어떤 사람인가?”

“이전에는 몰랐고, 해방 후에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 좋아 우리들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자네는 우한 사태에 어떤 방법이 있다고 보나? 그가(천자이다오) 나를 반대하는 것인가?”

“주석, 누구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옛 홍군, 옛 간부, 옛 당원, 일반 백성들 모두 주석을 큰 구원의 별로 보고 있습니다. 군대에 있는 옛 동지들 모두 주석과 혁명을 했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천자이다오도 나를 반대하는 게 아니야. 만약에 천(천자이다오), 중(중한화)이 나를 정리하려 했으면 우리들이 우한을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걸세!”

양청우는 이때 마오가 이틀간 냉철하게 숙고해 우한 군구 영도에 대한 해결방법을 비교적 실제에 맞도록 해법을 찾았다고 회상했다. 양청우는 마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이 주석에게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마오는 “맞아! 맞아! 맞아!”라고 흐뭇해하며 잇따라 “맞아(對 대)!”를 3번 말했다고 한다.

“천자이다오는 (지금)어디에 있나? 중한화, 니우(牛 우) 사단장, 차이(蔡 채) 정치위원은 모두 어디에 있나?”

“정확히 모릅니다.”

“자네는 저우 총리에게 천자이다오, 중한화, 니우 사단장, 차이 정치위원 모두를 (베이징의)징시빈관(京西賓館 경서빈관)으로 불러 만나도록 하라고 말하게. 천자이다오에게 3마디, 하나, 잘못을 자아비판하고 둘, 학습에 유의하고 셋, 안전에 주의하도록 전달하라고 말하게.”

마오는 다음날 중앙을 대신해 우한군구 당위원회에 보내는 문서를 기초해 전보로 보냈다. 마오는 전보에서 “엄중한 과오를 저지른 간부, 자네들과 광대한 혁명 군중을 포함해 천자이다오 동지를 타도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하고, 진심으로 바르게 고치도록 하라. 아울러 광대한 혁명 군중들의 양해아래 일어나 혁명대열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린뱌오와 장칭은 ‘7.20 사건’을 ‘철두철미한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하고 천자이타오를 ‘괴수(魁首)’로 지목해 죽이려 했다. 그러나 마오가 전보에서 천자이다오를 ‘동지(同志)’로 표현해 천자이다오의 목숨을 살리는 보호막이 됐다. 천자이다오는 회고록에서 “만일 마오쩌둥 주석이 쓴 ‘동지’라는 이 두 글자가 없었더라면 린뱌오 일당이 우리들을 죽이려 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쉬웠을 것”이라고 서술했다.

마오는 1개월 뒤 양청우 등과 이야기를 하면서 우한에서 ‘노동자 총부’를 선동해 ‘7.20 사건’을 야기한 장칭파의 왕리(王力 왕력)를 비판하고, 왕리에게 자아비판을 하도록 지시했다. 1967년 8월 25일 오전 1시 저우언라이는 상하이에서 온 양청우와 최근 발생한 장칭파의 중앙문혁 소조원 왕리의 ‘8.7발언’과 관펑(關峰 관봉)이 기초해 ‘훙치(紅旗 홍기)’에 실은 ‘군내의 한 줌을(수정 자본주의자) 적발 비판하자’의 글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결방법에 관해 이야기 했다.

저우는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극좌 사조의 범람으로 인한 연쇄반응을 우려하며 관펑이 쓴 글을 마오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왕리의 ‘8.7 발언’은 왕리가 8월 7일 외교부 조반파들에게 국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인 천이(陳毅 진의)를 적발 비판대회에 끌고 나가 비판하도록 선동한 내용이다. 왕리의 선동으로 외교부에 대한 ‘탈권 투쟁’이 본격화하고 급기야는 8월 22일 밤 외교부 조반파와 홍위병들이 치외법권 지대인 영국의 공관에 쳐들어가 방화해 건국 이래 최대의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됐다. 양청우는 이날 오전 상하이로 돌아가 마오에게 저우언라이의 전언을 전달했다. 양청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주석 477)

“마오쩌둥 주석은 (보고를)들으면서 연신 담배를 피웠다. 말도하지 않고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보고가 끝나자 마오 주석은 ‘청우야! 자네 피곤하겠다. 먼저 돌아가 쉬어라! 내가 자료를 살펴보고 숙고를 해보겠다. 일이 있으면 자네를 찾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마오 주석이 ‘자네가 즉시 베이징에 갈 수 있도록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준비가 되는대로 다시 오라고 말했다.”

“베이징으로 갈 준비를 끝내고 주석을 찾아갔다. 마오 주석은 나에게 구술을 하며 받아 적도록 했다. 마오는 ‘왕(왕리), 관(관펑), 치(치번위)는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네는 총리 한 사람에게 총리가 책임을 지고 그들을 체포하라고 보고하라’고 말했다. 마오 주석은 기록을 훑어본 뒤 ‘자네는 돌아가 이렇게 총리에게 즉시 처리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응접실을 나왔을 때 마오 주석이 불러 세웠다. 주석은 ‘고려할 것이 있다. 치(치번위)는 잠시 놔두고 자아비판을 시키도록 하라’고 말했다.”

양청우는 정오께 베이징에 도착해 곧바로 댜오위타이(釣魚臺 조어대)로 달려가 저우언라이를 단독으로 만나 마오의 결정을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는 결심을 한 뒤 일이 늦지 않도록 곧바로 회의를 열었다. 그날 밤, 댜오위타이에서 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중앙의 소형 간담회가 열렸다. 천보다, 캉성, 장칭 등이 참석했다. 저우언라이가 오늘의 회의는 마오 주석의 중요 결정을 전달하는 회의다. 그는(저우언라이) 한 글자 한 문구씩 마오의 지시를 낭독했다. 뒤이어 왕리, 관펑을 체포해 격리시켰다. 나중에 마오의 1차 회의의 지시에 따라 치번위를 체포했다.”

중앙문혁 소조원인 왕리(王力 왕력), 관펑(關峰 관봉), 치번위(戚本禹 척본우) 3명은 문혁이 시작된 뒤 조반파가 극단적 행동을 취하도록 사주하면서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데 선봉구실을 했다. 특히 왕리는 우한에서 조반파를 선동해 사태를 악화시킨 장본인이지만 베이징에 돌아온 뒤 장칭과 린뱌오파의 대대적인 환영으로 영웅대접을 받은바 있었다. 마오가 이들을 체포해 격리 심사하는 조처를 취하면서 장칭(江靑 강청)과 중앙문혁 소조는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마오가 허겁지겁 상하이로 피신했을 때 왕홍원(王洪文 왕홍문)에게는 일생일대의 ‘벼락출세’의 기회가 되었다. 왕홍원은 이때 30여만 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긴 창과 곤봉으로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트럭, 지게차, 소방차를 타고 다니며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노동자 혁명조반 총사령부(工總司 공총사)’에 반대하는 세력을 깨부수고 있었다. 마오는 한 밤중에 완전무장한 차를 타고 상하이 와이탄(外灘 외탄) 거리를 순시한 적이 있었다. 마오는 노동자들이 손에 긴 창을 들고 무장한 채 안전모를 쓰고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문 앞을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하이 형세가 우한(武漢 무한)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노동자 조반파들이 상하이를 완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흐뭇해했다.

마오는 장춘챠오에게 상하이 민병(民兵)을 다시 조직해 10만 명을 무장시키도록 지시했다. 장춘챠오는 총기무장을 타진했으나 마오는 곤봉 등으로 무장하도록 했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특별히 노동자 조직을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상하이 텔레비전에 노동자들의 프로그램을 방영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텔레비전에서 왕홍원이 비판대회에서 총결발언을 하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보았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상하이 노동자 계급에 의존하려는 뜻을 간파하고 왕홍원과 ‘공총사’를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삼을 계책을 짰다. 장춘챠오는 마오에게 왕홍원의 ‘홍색(紅色; 공산주의) 경력’을 설명했고, 마오는 대단한 흥미를 보였다. (주석 478)

이를 계기로 왕홍원은 다음 해 건국절인 1968년 10월 1일 당 중앙과 국무원이 초청한 전국 노동자와 노동자 선전대의 대표들이 베이징에 왔을 때 상하이 대표단을 이끌고 중난하이에서 묵게 되었다. 왕홍원은 한 밤에 많은 노동자 대표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오쩌둥을 단독으로 접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마오의 배려였다. 톈안먼 광장에서 건국절 행사를 끝내고 분열식을 할 즈음 장춘챠오는 왕홍원을 톈안먼 성루의 귀빈실로 데리고 갔다. 장춘챠오는 마오가 중앙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왕홍원만 남겨 둔 채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 마오는 왕홍원을 곁에 있는 린뱌오에게 소개시켰다. 마오는 이곳에서 왕홍원을 접견하면서 직접 왕홍원의 경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건국절 참관행사가 끝난 뒤 상하이 대표단들은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마오는 왕홍원을 베이징에 잔류시켜 10월 13일부터 열리는 확대한 중앙8기12중전회에 참관인으로 참석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전체회의에서 왕홍원을 표창하고, 120만 명의 노동자가 국면을 장악하고 있는 상하이가 베이징 보다 강하다고 말하면서 왕홍원을 한껏 추켜세웠다.

마오는 10월 31일 폐막식에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왕홍원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마오는 “저사람(왕홍원)이 ‘공총사’ 책임자고,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위원”이라고 소개한 뒤 왕홍원이 이끈 ‘안팅(安亭 안정)사건’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왕홍원은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상하이로 돌아 온 왕홍원은 마오와 함께 찍은 사진을 상하이 전람관에 전시해 환골탈태한 자신의 위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마오가 이처럼 왕홍원을 중시하자 장춘챠오는 곧바로 상하이시 혁명위원회 서열을 조정해 자신과 야오원웬의 뒤 서열인 3위에 올려 왕홍원이 서열 3위라는 “왕라오싼(王老三 왕로삼)”으로 불렸다. 어쨌든 이런 마오의 운명적 지우를 얻은 왕홍원은 나중에 마오의 3번째 후계자가 되고, 상하이방인 장칭, 장춘챠오, 야오원웬과 악명 높은 ‘4인방(四人幇)’을 형성해 문혁을 이끌면서 정권을 농단하게 되었다.

476)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7) 毛澤東傳 1949-1976(下)  主編  逢先知  金冲及   中央文獻出版社
478) 毛澤東選過三個接班人, 最後一個爲何是沒資歷的王洪文?  舒 云   ‘黨史博覽’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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