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哈爾賓)은 ‘아시아의 파리’, ‘동방의 모스크바’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실제 하얼빈 시내 중심지를 걷다 보면 중국이 아닌 유럽의 어느 한 도시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둥근 돔 지붕의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성 소피아(圣 索菲亚) 성당(1932년 준공)을 비롯해 눈 앞에 펼쳐지는 유럽식 건축물과 벽면의 화려한 조각 장식, 고전미가 풍기는 검은색 철제 기둥 끝에 매달린 유리 상자속 가로등 불빛이 이국적이면서 낭만적이다. 하얼빈은 동북 3성중 종합경쟁력면에서 선양(瀋陽), 다롄(大連)에 이어 3위의 서열이지만 도시 공간이 풍기는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면에서는 단연 1위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서울의 명동 거리격인 중앙대가(中央大街)는 역사가 오랜 유럽식 건물들이 즐비해 길을 걷노라면 서구적인 정취를 더한다. 남자든 여자든 이곳에서 혼자서 길을 걷는다면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든다고나 할까.

중앙대가는 수백년 된 유럽 건물 양식의 박물관

중앙대가는 각종 양식의 유럽 건물들을 한 곳에 모아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앙대가는 말 그대로 ‘중앙으로 난 큰 길’이다. 중앙대가는 하얼빈을 대표하는 얼굴마담이다. 신양광장(新陽廣場)에서 북쪽으로 쑹화장(松花江) 강변의 팡훙지녠타(홍수방지기념탑, 防洪記念塔)까지 일직선으로 쭉 뻗은 길이 1.4㎞, 너비 21m로 난 도로를 일컫는다. 길이 0.7㎞에 폭이 12m인 서울 인사동 길의 2배 가량되는 셈이다. 중앙대가는 1897년 6월에 첫 길이 생기기 시작한 때로부터 114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사동 길과 달리 평소 차량 진입이 금지돼 있다. 특히 야경이 환상적이다. 길 위에 쓰레기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얼빈 사람들은 이 길이 ‘아시아 최장, 최대의 보행로’라고 자부심이 대단하다.
 

   
19세기 신예술운동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100년 가까이 된 마뎨얼빈관.사진 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중앙대가에 세워진 유럽풍 건물중 기념비적인 건물로는 마뎨얼 빈관(馬迭爾賓館)이 꼽힌다. 이 건물은 1906년에 세워진 뒤 1913년에 새로 지었다. 19세기 신예술운동 풍으로 대리석 건물 처마 끝 곡선과 원형창문, 가운데 배치한 철제베란다가 우아한 고전미를 더한다. 이곳은 원래 러시아 국적의 유대인이 경영하던 호텔로 쓰였으며 20세기 초 연해주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곳이다. 또 현재 신화서점(新華書店) 과 교육서점(敎育書店) 간판을 내걸고 있는 중앙대가 120호 건물은 1909년에 건립이 되었는데 17세기 바로크 양식 건물중에서는 하얼빈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입구 위쪽 벽에 새겨진 2명의 인물 조각상이 생동감이 넘치는데 1920년대에 일본 상인이 무역상사인 쑹푸양항(松浦洋行)을 개설했던 곳이다.

러시아인 등 하루 국내외 관광객 등 20만명의 발길 이어져

이곳은 각종 행사들로 넘쳐난다. 해마다 7월에는 맥주 페스티벌인 피주제(啤비酒節)가, 12월 말부터 시작되는 빙등제(氷燈節) 기간에는 중앙대가 한 가운데로 환상적인 얼음조각이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장관을 이룬다. 또 서양음식축제, 페스티벌, 혼인축하행사, 패션쇼, 거리문화제, 쇼핑축제 등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러시아인 등 국내외 여행객을 비롯해 매일 20만명이 이곳을 찾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길 하나가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명품 관광상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중앙대가는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한 <중러밀약>의 산물

어떻게 유럽식 건물이 중국땅인 이 곳에 운집해 있는 것일까? 이 사연을 이해하자면 19세기말 역사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1896년 5월 ‘이빨 빠진 호랑이’ 청나라의 특사 리훙장(李鴻章)과 제정러시아 대장대신간의 <중러밀약>에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통하는 길목인 중국의 쑤이펀허(绥芬河)로부터 서쪽 만저우리(满洲里)까지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놓기로 한 계약이 시작이다. 이때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동청철도의 부설권을 따냈으며 러시아의 유럽식 문화가 하얼빈에 이식된 계기가 됐다.

청나라는 당시 대륙 침략의 발톱을 세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이이제이(以夷制夷)로 활용하기 위해 끌여들였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1898년 7월 <동청철도공사 연속계약>을 맺어 하얼빈에서 뤼순(旅順)까지 동청철도 남부선 부설권까지 차지하는 등 청나라를 압박하는 지렛대로 활용했다.

하얼빈은 1896년 당시 동청철도를 건설의 중심기지였으며 ‘중앙대가’는 이 배경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만저우리-하얼빈-쑤이펀허-우쑤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진 당시 동청철도 노선은 지금도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주간선철도로 사용되고 있다.

중앙대가의 역사는 115년, 처음은 ‘중국대가’(中國大街)로 시작

하얼빈을 경유하는 동청철도의 건설을 위해서는 막대한 건설기계와 건축자재의 투입이 불가피했다.

당시 러시아는 철도공사를 위해 공사에 필요한 건축기계와 목재 등 재료를 하바로브스와 우쑤리장(烏蘇里江), 헤이룽장(黑龍江)을 통해 쑹화장(松花江)까지 강길로 운반해 왔으며 중앙대가의 북쪽 방홍기념탑(防洪記念塔)이 있는 쑹화장 강변이 당시 짐을 내리는 하역부두였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신화서점 건물. 사진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이 곳은 현재도 관광객을 태우는 유람선 부두로 남아있다. 이 부두에서 철도건설 기자재를 실은 마차가 쑹화장의 소택지와 갈대밭에서 빠져나와 하얼빈 일대 철도공사 현장까지 강가의 진흙길을 반복해 오가면서 무수한 바퀴자국이 생겨났다. 짐 실은 마차들이 무수히 다니면서 난 이 길이 나중에 중앙대가의 시작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중국대가’(中國大街)로 불렸다. 동청철도의 건설이 가속화되면서 외지 노동자들과 중국 주민들이 길가 양옆으로 집을 지으면서 점차 큰길 모양이 갖추어져 갔는데 처음에는 먼지가 펄펄 날리고 비가 내리면 진흙탕 길로 변하는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1901년 3월 3일에 러시아의 우수리스크에서 하얼빈까지 기차가 첫 개통되었고 1903년 7월 14일에는 하얼빈부터 만저우리까지 동청철도의 나머지 구간이 뚫리면서 하얼빈은 더욱 발전하게 된다. 1904~1905년 러일전쟁뒤 하얼빈은 빠르게 러시아군의 후방기지가 되었다.

1920년대 중앙대가엔 수영복 입은 금발 미녀들이 활보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내전을 거치면서 러시아, 폴란드,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등 고향을 등진 10여개국의 외국인들이 하얼빈에 운집하게 되면서 중국대가는 어디서나 금발과 푸른 눈의 서양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초 최대 33개 국가에서 외국인들이 모여들었고 19개국의 영사관이 개설돼 있었다.

   
중앙대가 거리. 사진출처=중국포털 바이두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의 통치권 아래 있었으며 중국대가에는 러시아어로 된 간판이 즐비했다. 또 외국 상점, 약국, 식당, 여관, 술집, 댄스홀 등이 부지기수였다. 또 영국의 나일론 옷제품, 프랑스 향수, 러시아 모피, 일본의 면직물, 독일의 약품, 미국의 통조림, 스위스의 시계 등 서양의 값비싼 고급제품들이 운집했다. 중국 정부는 1926년에서야 러시아로부터 하얼빈시 통치권을 넘겨받았으며 1928년 7월 ‘중국대가’를 ‘중앙대가’로 개칭하고 간판을 교체했다.

번영기이던 10~20년대 당시의 흑백 영상물을 보면 서양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멋스럽게 눌러 쓴 서양인 신사들이 검은색 승용차 사이로 바삐 길을 오가고 금발의 젊은 미녀들이 여름철 쑹화장에서 요트를 타고 수영을 마친 뒤 원피스 수영복 차림으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거리를 지나가는 장면도 보인다.

영광과 영욕이 교차한 역사…일제강점기 때 수심 1m 물에 잠겨

중앙대가는 양쪽의 인도를 뺀 길바닥에 폭 10.8m로 깔린 화강암 보도블록으로 유명하다.

러시아가 중국에 통치권을 넘기기 한 해 전인 1924년 5월 러시아의 기술자들이 화강암을 가로 18㎝, 세로 10㎝ 크기의 벽돌로 만들어 촘촘히 바닥에 박아 넣으면서 중앙대가는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다. 현존하는 화강암 보도블록의 역사는 87여 년 전에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화강암 벽돌의 크기와 모양이 러시아 식빵 모양과 비슷해 ‘러시아 식빵 벽돌’로 불렸는데 당시 벽돌 한 개의 가격이 은화 1루블로 일반 평민 가족의 한달 식비와 맞먹는 가격이어서 ‘황금 포장도로’로 불리기도 했다.

중국은 1996년 8월에 전면 보수공사를 실시했는데 현재 약 87만개의 화강암 벽돌이 가지런하게 빈틈없이 박혀있다. 이 화강암벽돌은 길고 긴 세월 동안 무수한 인간들의 발길로 닳고 닳아서 표면과 모서리가 둥글며 윤기가 난다.

   
비잔틴 건축양식의 성소피아성당.사진출처=중국포털 바이두
 

중앙대가엔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이 1931년 ‘9.18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이 길은 굴욕의 역사를 맞게 된다. 일본군 천지가 되면서 도처에 일장기가 내걸리고 기모노, 중국말로 ‘허푸’(和服)를 입은 일본 기생들의 게다짝(나무 신) 소리로 분주했던 중앙대가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32년 쑹화장 강둑이 터지면서 대홍수로 수심 1m 깊이로 잠기게 된다. 당시 주민들은 소형 보트를 저어 중앙대가를 긴급히 탈출했으며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하고 기아에 질병까지 겹치면서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문화혁명이 시작된 1966년부터 10년간은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길’이란 의미의 ‘판슈다다오’(反修大道)로 불리다가 76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중앙대가를 거닐다 보면 소용돌이 치듯 흘러간 100여년의 역사가 한꺼번에 발끝에서 전해지는 듯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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