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월 2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천이를 국민혁명군 신편 제4군 군단장 대리, 장윈이(張雲逸 장운일)를 부군단장, 류샤오치를 정치위원, 라이촨주(賴傳珠 뢰전주)를 참모장, 덩즈후이(鄧子恢 등자회)를 정치주임으로 각각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 장제스가 신4군 군대 명칭을 거두어 들여 소멸했던 ‘신4군’은 새롭게 태어났다.

애초 신4군은 1937년 12월, 남방 8개 성 13개 지구의 홍군 유격대 1만 3천여 명으로 만들어졌다. 완난사변 전 3년 동안 샹잉은 ‘통일전선에 일체 복종하고, 모든 것은 통일전선으로’라는 왕밍의 우경노선을 추종해 위장된 국민당군의 협공을 타파할 수 없어 신 4군은 완만한 발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완난사변 때 병력이 2만 5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8로군은 3만여 명의 병력으로 출발했지만 완난사변때 병력이 50만 여명에 이르는 등 일취월장의 급성장을 했다.

완난사변 후 장제스는 신4군을 ‘반군(叛軍)’이라고 비방하면서 신4군의 부대명을 없애버리고 예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밝혔다. 류샤오치는 장제스의 횡포에 맞서 중공중앙에 “천이를 신4군 군단장 대리로 임명해 장쑤성 북쪽에 군 지휘부를 세울 것”을 건의했다. 류샤오치는 18일 천이와 연명으로 중앙에 전보를 보내 재차 건의하는 한편, ‘국민당 보수 반동파가 발동한 완난사변 구실 반박에 관한 통보’를 통해 구체적 사실을 동원해 국민당의 신4군 부대명칭 취소와 중상모략을 논박하며 장제스가 조성한 완난사변의 진상을 폭로했다.

류샤오치는 또 “명령을 거역하고, 부대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판창(繁昌 번창), 통링(銅陵 동릉) 일대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지정노선을 따르지 않고 징시옌에서 남향해 우군을 습격했다는 발표는 완전히 날조한 것“이라고 통박했다. 중공중앙은 류샤오치와 천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1월 20일 새로운 신4군을 재건하는 군부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 명령을 받은 류샤오치는 신4군 부대의 재건에 착수했다. 류샤오치는 신4군 간부회의를 열어 국내외 정세를 분석해 소개한 뒤 “우리는 통일전선의 방침과 내전반대를 견지하고 분열적인 방침을 반대해 시국의 위기를 구하고 끝까지 항전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류샤오치는 화중(華中)에 온 뒤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실명을 사용했다. 류샤오치는 전에 줄곧 ‘후푸(胡服 호복)’라는 가명을 써왔다.

류샤오치는 완난사변 이후 나타난 비관적 정서와 일부 8로군 지휘관들이 신4군 개조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를 딛고 고달프고 힘든 세밀한 사상공작을 펼쳤다. 류샤오치는 마침내 신4군을 7개 사단 9만여 명의 병단으로 개편하고 활동구역을 획정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2월 18일 수위(粟裕 속유)를 제1사단 사단장, 류옌(劉炎 유염)을 정치위원, 장윈이(張雲逸 장운일)를 제2사단장, 정웨이산(鄭位三 정위삼)을 정치위원, 황커청(黃克誠 황극성)을 제3사단장 겸 정치위원, 펑쉐펑(彭雪楓 팽설풍)을 제4사단장 겸 정치위원, 리셴녠(李先念 이선념)을 제5사단장 겸 정치위원, 탄쩐린(譚震林 담진림)을 제6사단장 겸 정치위원, 장딩청(張鼎丞 장정승)을 제7사단장, 쩡시성(曾希聖 증희성)을 정치위원으로 각각 임명했다.

신4군은 병력 9천여 명을 잃은 뒤 9만 명으로 재편성해 부대를 신속히 발전시켰고 항일 전쟁이 끝날 무렵엔 이미 30여 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이로써 공산당은 중국의 한복판인 화중지역에 탄탄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중공중앙은 완난사변의 악재를 신4군과 근거지를 확대하는 호기로 삼는데 성공했다. 장제스의 통제아래 있던 신4군을 공산당의 당군(黨軍)으로 완전히 탈바꿈시켜 북으로는 롱하이(隴海 농해)철도, 남으로는 안후이성 남쪽과 장쑤성 남쪽을 방어해 근거지의 활동구역을 크게 확장했다. 이에 따라 중공중앙은 샹잉이 서기로 있었던 동남국과 중원국을 통합해 화중국으로 확대 개편했다.

류샤오치는 화중국 서기 겸 신4군 군사위원회 분회 서기가 됐다. 류샤오치는 문장과 문건, 강연 등을 통해 국공 통일전선에서 독립자주를 견지하는 당의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이론을 무장화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마오는 완난사변의 처리가 일단락되자 5월 8일 ‘제2차 반공고조를 물리친데 관한 총결’의 당내 지시를 발표해 완난사변의 투쟁경험을 이렇게 밝혔다. (주석 202)

   
류사오치
 
“중일(中日) 민족간의 모순은 여전히 기본적이다. 국내 계급간의 모순은 여전히 종속적 변수다. 결코 1927년의 형세(장제스가 1차 국공합작을 깨뜨리고 공산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공산당이 지하로 잠입하는 위축됐던 상황)를 조성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정부를 이끌어 가는 모든 정책은 영미(英美)파 대지주와 대자산가들이다. 양면성의 계급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일본과의 대립이고 또 하나는 공산당 및 기타 광대한 인민을 대표하는 세력과의 대립이다. 그들의 항일과 반공도 또한 각각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왕에 항일이 존재하는 만큼 우리당에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한다. 우리당의 방침은 싸움에는 싸움, 휴전에는 휴전으로 대응한다. 이것이 혁명의 양면 정책이다. 장제스의 반혁명 정책에 첨예하게 맞서는 투쟁을 제외하고 어떤 인민혁명 역량이 만약에 장제스의 소멸을 피하려 한다면 그가 이런 역량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1941년 5월 하순 일본군은 재건된 신4군 대소탕전에 나섰다. 류샤오치와 천이는 신4군 3개 사단과 지방부대를 잘 배합해 적극적인 유격전으로 나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신4군은 8월 20일 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요전투 135차례를 치러 일본군과 왕징웨이 괴뢰군 1932명을 사상시키고 1089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류샤오치는 완나사변 이후 어려운 국면에 신4군을 맡아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눈부신 분전과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 중공중앙의 중요 영도자로 성큼 다가서는 기회를 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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