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님 영전에 삼가 곡합니다.

며칠 전 병원에서 뵐 때만 해도 알아보시는 것 같더니 정녕 눈을 감으셨습니까. 그동안 강인한 의지로 병마와 싸움에서도 털고 일어나곤 하셨는데 이제는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셨습니까.

마음 한켠이 이리도 시리고 허전한 것은 참담한 우리 현실 때문일까요.

남북 간에는 휴전이래 처음으로 북한의 도발로 연평도에서 포격전이 전개되어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하고, 그 와중에 기회를 노렸다는 듯이 헌법재판소는 야당의원 86명이 낸 미디어법 관련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토록 염려하시던 남북관계가 파탄지경에 빠져서 자칫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을지 모르고, 민족의 적대와 반민주ㆍ반인권의 전위 역할을 해온 보수신문들은 마침내 지상파 방송을 거머쥐고 종편 및 보도전문 채널을 갖게 되었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심의가 남았다고는 하지만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국민은 어느 신문사에 종편이 넘어갈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

브레이크 없이 치달리는 남북열차는 겨레의 안위를 위기로 몰아가고, 여론의 다양성이 한쪽으로만 편향되어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긴 세월 광신적 반공주의와 시대착오적 냉전사상을 비판하면서 분단 체제에서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무리들의 허위의식을 벗기고 그들과 지치지 않는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저들에게는 공권력이라는 ‘국가폭력’과 진실과 여론을 손쉽게 조작하는 거대 미디어가 있었고, 흑을 백으로 조작하는 검찰권과 기소장과 판결문을 똑같이 복사해내는 사법권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선생님에게 ‘의식화의 원흉’ ‘친북좌경’ ‘사회주의자’ 등 색깔론과 마녀사냥을 자행하고,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저자는 감옥에, 저서는 금서처분하는 현대판 분서갱유를 저질렀지요.

선생님께서는 언론사에서 두 번, 대학에서 두 차례 쫓겨나고 10여 회에 걸쳐 구속되는 등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이성과 지성, 정론과 직필을 통해 우상들과 맞서면서 자유언론과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였습니다.
 60년 전 6.25전쟁 때는 육군 장교로 최일선에서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50년 전 4월 혁명기에는 일선 기자로서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한 것은 물론 시민ㆍ학생들과 시위 현장에서 독재타도에 나서고, 40년 전 1970년에는 언론사에서 쫓겨날 만큼 자유언론의 필봉을 굽히지 않았고, 30년 전 1980년에는 ‘광주폭동’의 주모자로 몰려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모진 고통을 겪고, 20년 전 1990년에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한해 전 〈한겨레〉창간기념 북한취재 기자단 방북기획 건으로 구속 기소되고, 10년 전 2000년에는 6.15선언과 남북화해 협력을 지지하면서 통일의 꿈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그해 뇌출혈로 우측 반신마비로 모든 공적 활동과 집필활동을 중단하고 건강회복에 전념하셨습니다.

이후 건강이 많이 좋아져서 자서전〈대화〉를 펴내고, 근래에는 이명박 정권의 민주화 퇴행과 남북경색을 지켜보면서 파시즘 초기증세라고 비판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80년 생애의 꺾어진 10년 단위를 정리해도 이러할 때 고난과 저항, 박해와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중첩의 삶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고난 속에서도 선생님은 언론인으로서 학자로서 소신과 지행합일, 지식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오셨습니다.

   
  ▲ 리영희 선생의 마지막 저서 '대화'  
 

독재자들과 타협하면 얼마든지 승진과 재물이 따르고 출세의 길이 있었음에도 언론인ㆍ지식인은 그래선 안 된다는 직업의식, 지성인의 도리에 충실하셨지요. 글쓰기의 목적은 오직 ‘진실의 추구’에 있다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정론을 폈지요.

동배들이 또는 선후배들이 권력에 기웃거리며 곡필과 어용의 붓춤을 추며 정ㆍ관계로 넘어가거나, 언론계 터줏대감으로 남아 여론을 왜곡할 때도 선생님은 펜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회갑상도 차리지 못하고, 어머니 임종을 감옥에서 맞아야 했으며, 60이 넘어서야 집에 온수가 나오는 문명의 혜택을 받고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언론을 사랑하셨고 그만큼 언론의 기능을 중요시하셨으며, 공정한 언론기관의 여부가 선진화의 척도라고 말씀하셨지요. 대학에서 20연 년을 봉직하셨으면서도 자신은 언론인 70, 교수30이라고, 언론인의 자부심을 견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단재 신채호, 씨올 함석헌, 청암 송건호, ‘말갈’ 리영희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 언론인의 정맥(正脈)을 지켜오셨습니다. 그 사이 친일언론인ㆍ친독재언론인ㆍ곡필언론인ㆍ어용언론인ㆍ사이비언론인이 한 때는 여론의 중심이 되는 듯했(하)지만 역사는 냉정하고 엄숙하여 사이비들을 반드시 골라내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강퍅하고 고달팠지만 남기신 많은 글과 저작은 여전히 ‘현재성’의 생명력을 갖고, 꼿꼿하게 걸어오신 생애는 후배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 시각(1994년)에도 전쟁을 원하는 세력과 개인들이 있는 것 같다. 전쟁을 바라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도 몰상식적이고 무책임할 수 있을까 싶은 말과 글이 요새 사회와 정부의 언론기관을 주름잡고 있다는 느낌이다”는 십수 년 전에 쓰신 글이 귓전을 때립니다.

통역장교 7년 동안 끝까지 “미국이 불하한 외국군대의 정복을 마다하고 작업복을 고집” 했던 ‘강단’, “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글을 쓰는 것이지 무슨 ‘주의자’가 아니라”는 ‘언론관’, “족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則不殆)는 ‘평정심’을 후학ㆍ후배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리영희 선생님, 이제 영결의 순간입니다. 저세상에서는 편히 영생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언롱’을 일삼는 글쟁이들에게 모진 죽비를 휘갈겨 주십시오.

중국의 5.4혁명을 이끌었던 양계초가 사망했을 때 여석산(閭錫山)이란 학자가 쓴 조사의 한 구절을 선생님 영전에 바칩니다.
 
지은 글은 키만큼 높았으니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라
사숙한 제자 얼마나 많은지
깨우치고 이끌어 동시대 영재들을
격동시켰으니
뒤 이을 인재 그 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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