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80) 선생이 5일 "걱정스러울 만큼 오른쪽 즉 우익 날개만이 커가고 함께 더불어 기능을 발휘할 좌측 날개는 왜소해지고 위축되는 상황"이라고 한국 사회를 진단했다. 또 "우리 정부가 오히려 경직되고 북에 대한 우월감으로 잘못 한반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지 않겠나 걱정된다"며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은 이날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출연해 '한국 사회는 좌우는 날개로 날고 있다고 판단하는지' 묻는 질문에 "지금은 전혀 아니다"라며 현 정국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리영희 선생은 '남북 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취할 방향성'에 대해선 "미국은 태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이 요구했던 평화협정 체결, 정치회담 개최에 대해서 50년 동안 거부해 오던 것에 상당히 접근하려는 표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현 정부의 '경직된' 대북 정책을 꼬집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지난 1976년 발간된 '전환시대 논리'가 올라 온 계기로 마련됐다. 리영희 선생은 베스트셀러 배경에 대해 "그런 시대가 안 되길 바랬는데 전진하는 우리 사회 모습을 보길 바랐는데 (사회가)후퇴하니까 그 책에 그런 의견이 생기는 모양"이라고 해석했다.

   
  ▲ 리영희 선생.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시사적 문제 이외에도 이날 인터뷰에선 리영희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질의 응답도 이어졌다. 리 선생은 '삶을 되돌아 볼 때 가장 반성한 부분'에 대해선 "공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성해야할 만한 자기 부정해야할 만한 일을 시도해본 일이 없다"면서도 "개인의 가정 생활에서 제 아내와 가족에서 하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반성을 한다"고 밝혔다.

리영희 선생은 또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분들에게 "그런 분들을 만날 때 늘 '많은 것에 죄를 지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마음 속으로 반성을 한다"며 "부채 의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리 선생은 "쓰러져서 반신불수 된 것이 꼭 10년인데 좀 더 책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고 사상을 굴릴 수가 있었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보탤 수 있는 뭔가 저술을 할텐데 이제 전혀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됐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로 했다. 한편, 12월 중순, 언론인 등 10여 명은 선생의 삶이 주는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대입해보는 <선생 리영희>(가제·사계절출판)를 발간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날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벌써 한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 거동을 잘 못하고 요새는 만성 기관지염이 재발해서 고생하고 있죠."

- 평소 '내 책이 읽힐 필요가 없어 인세가 0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소간의 저서와 책들이나 써온 내용들이 시대를 조금씩 앞서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깨우치고, 더 이상 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의식 수준이 올라왔으면 했다. 그러면 뭐 책을 읽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계속 책이 팔리는 것 같아요? 인세가 조금씩 들어오려는 모양인데."(웃음)

- 얼마 전에는 베스트셀러 1위에도 잠시 오르기도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왜 '전환시대 논리'가 통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 책이 필요한 시대 됐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런 시대가 안 되길 바랬는데 전진하는 우리 사회 모습을 보길 바랐는데 후퇴하니까 그 책에 그런 의견이 생기는 모양이에요."

- 1950년대 중역부터 언론인, 학자, 사회 비평가, 국제문제비평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당시 삶을 지성인에 해당하는 구간이라고 하셨는데 지성인이라고 쓴 특별한 이유는? 지식인과 차별을 두고 말씀하셨는지요?
"임의로 차별을 뒀죠. 요새는 흔히 기술적인 지식인, 전업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이다 보니까. 사회 공동체, 자기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은 없이 오로지 고도의 기술, 직업적 지식으로 사는 이 사람들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에요. 지성인은 '개별적으로 살면서 전체 일원으로서 전체 생존과 복지와 운명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지성인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 흔히 얘기하는 진보 진영,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말씀하신 것인지?
"저는 진보 진영, 보수 진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살아가는 방법, 패턴으로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을 해서 무슨 '주의' 이런 식의 표현을 싫어하기 때문에 진보, 보수를 초월해야죠."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을 쓰신 바 있다. 그때는 좌우로 나눠서 말씀하셨다.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철학에서 좌우(용어를) 흔히 쓴다, 그런 의미에서 쓴거죠."

- 한국 사회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있다고 판단하는지요?
"지금이야 전혀 아니죠. 어떻게 될거냐 걱정스러울 만큼 오른쪽 즉 우익 날개만이 커가고 함께 더불어 기능을 발휘할 좌측 날개는 왜소해지고 위축되는 상황이라고 봐야죠."

- 그런 속에서도 왼쪽 날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진보진영은 늘 그런 비판 받아왔습니다만 분열한다는 비판이 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
"세계 정치사를 보면 우익이라는 세력은 이해 관계 말하자면 뭘 가지고 더 먹고 덜 먹고 하는 것으로 분열해요. 소위 좌익이라는 세력은 먹을 것으로 싸우다 분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념·이론의 세분화를 극단까지 몰고 가는 그런 나쁜 성향이 있어서 분열하고 자멸한다. 두 가지 별도의 대립하는 양상이다. 오히려 우익이라는 것이 가지는 폭력성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가 되려는 모범을 좌측이 채택하고, 우측은 또 먹을 것을 쟁탈하는 데서 생기는 그런 것을 이론적인 좌측의 형태에서 배우고 이렇게 하면 쌍방이 다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작은 틀로 옮겨가려면 우리 현실 정치로 옮겨가야 하는데 그 질문까지는 안 드리겠다. 70년대 대학시절 선생님의 사상 매료된 사람들은 '의식화의 은인'이라고 했고 반대는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의식화의 원흉'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그래왔다. 조금도 듣기 거북한 것 없어요."

- 70·80년대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사상에)영향 받아 민주화 운동도 했고 감옥에도 다녀왔다. 부채 의식이 있으신지요?
"부채 의식이 있죠. 그런 분들을 만날 때 늘 '많은 것에 죄를 지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마음 속으로 반성을 하는거죠. 그러나 죄의식이라는 표현까지는 아니고 시대의 한 사회에서 한 시대가 변화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에요. 그래서 나도 역시 그 속에서 시대가 운명적으로 요구하는 그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거고 또 내 저서나 발언이나 사상에 공감해서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젊은이들도 그 시대의 산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의 길이었다고 봐요."

- 당시 젊은이들도 선생님께 부채의식 가지라는 분은 없을 것 같다. 고향이 평안북도신데, 누님 만나신 것이 98년도? 고향에는 누님이?
"그쪽 당국자들이 어렵게 무명의 농사꾼 조카를 찾아내 가지고 평양가지 데려와 만났죠, 누님은 벌써 가셨죠."

- 리영희 선생님 댁에서 인터뷰하기 때문에 뻐꾸기 시계(소리)가 정감 있네요. 밤에도 이렇게 울리면?(웃음)
"뻐꾸기가 현명해서 해가 떨어지고 어두우면 안 울어. 잘 만들었어요."(웃음)

- 요즘 남북관계도 조금 잘 안 풀리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고요, 특히 남북 관계에서 한국정부 취할 방향성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미국은 태도 변화가 있을 것이에요. 미국은 북한이 요구했던 평화협정 체결, 정치회담 개최에 대해서 50년 동안 거부해 오던 것에 상당히 접근하려는 표시가 있을 거 같아요. 우리 정부가 오히려 경직되고 북에 대한 우월감으로 잘못 한반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지 않겠나 걱정됩니다."

- 리영희 선생님 삶을 관통하는 팔십 평생 지켜오신 신념은 어떤 걸까요?
"흔히 얘기되는 거지만 검소한 생활(simple life)과 이념적으로 사고를 높이 가지는 거(high thinking)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령 흔히들 유행들이 많잖아요. 어느 정도 (살만)하면 골프 쳐야 하는 등 물적·세속적 자기 방기를 거부하는 거죠. 그런 것을 치워 검소하게 생활해야 사유·사고의 도덕적·논리적 수준의 높이를 순수하게 높여갈 수 있지 않나."

- 삶 되돌아 볼 때 가장 반성하신 부분은?
"공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성해야할 만한 자기 부정해야할 만한 일을 시도해본 일이 없습니다. 개인의 가정 생활에서 제 아내와 가족에서 하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반성을 하죠."

- 9번 연행되셨고, 5번 구치소에 수감되셨고, 재판도 많이 받으셨고, 언론계에선 두 번 그만두셔야 했다.
"대학가서도 박정희 때 쫓겨났다 죽고 나서 복직하고, 전두환 들어오자 쫓겨나고 말기에 복직됐다. 그런 생활이다 보니까 나는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제도화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완전 아웃사이더였던 셈이죠. 밤낮 쓴 소리하는 말이 권력자들의 비위나 거슬리고 함으로써 스스로 그 체제 안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까닭으로 제 자신이 고생 많이 한 거죠."

- 사모님께 빚을 많이 갚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이 들수록 일생 같이한 젊었을 때 고생에 대해선 참 갚아질 수가 없어요. 아무리해도."

- 요즘은 갚으시면서 사시죠?
"그럴려고 삽니다. 요새는 그렇게 삽니다. 비로써 가족과의 삶 되려고 할 때 병이 들어 쓰러지니 조금은 안타깝죠."

- 뭔가를 조금 더 앞으로 한 가지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쓰러져서 반신불수 된 것이 꼭 10년인데 좀더 책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고 사상을 굴릴 수 가 있었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보탤 수 있는 뭔가 저술을 할텐데 이제 전혀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 책 읽고 싶다고 했는데 기자 시절에도 엄청난 독서했다고 들었습니다.
"꼭 공부만을 위주로 산 사람은 아닌데 술도 많이 했고 방탕도 많이 했고 남과 다름없이 그냥 살아오면서 한가지 무지하게 독서를 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원고료가 조금 들어오면 서점에 가서 신간들 못 본 것을 꾸려서 집에 들어오는데 밤에만 와. 대문 밖에 책 꾸러미를 놓고 대문 두들겨 들어가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고 다시 (문밖으로)나와서 책 꾸러미를 들고 가요. (그걸)보면은 집사람, 어머니가 '식구들은 어떡하고 책만 사온다'며 좋아하지 않은다고. 그런 수법으로 해서 독서를 많이 했죠."

- 최근 읽으신 책은?
"눈 때문에 그렇고 종기로 쇠약하니까 오랜 시간 못 보죠."

- 레미제라블을 다시 원서로 떼셨다고?
"1800 페이지인데 형무소 들어가서 읽은 것을 한 20년 지나서 또 한번 읽고 싶어져서."

- 방송 듣는 많은 젊은 분들이 좌절할 것 같습니다. 들어올 때 보니 아파트 문패가 걸려있어서요. 거신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난 언제나 개인의 권위, 인격, 독립적 사유, 판단, 가치 이런 걸 중요시하기 때문에 집단으로서의 국가보다 개인, 인간의 중요성을 더 앞세워요.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지 않더라도 7년 동안을 6·25 군인으로서 군번으로 살아왔어요. 남들은 3년 반하니까 제대했는데 왜 그랬냐면 연락 장교 흔히 통역 장교로 잘하니까 (군에서)안 놔주었죠. 휴전되고도 못 나왔다고요. 7년을 했어요. 7년 동안 동조하지 못하고 굴복한 채 번호로만 불렀다고요. 나의 가치는 없고. 그 다음에는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여러 차례 형무소를 드나들면서 그때마다 소위 수번호로 가슴에 다 번호를 적어 가지고 불리었고. 번호가 나를 대신했어. 그것이 내가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거야. 그것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라면 (문패를)했다면 되지도 않는 거지만 (그래도)싫으니까 번호보다 내 이름 문패 걸어놓은 거죠."

- '전환시대 논리'라는 책이 뜻하지 않게 베스트셀러 된 그런 시대에 어떤 말씀 주고 싶으신가요?
"괴테가 후배들의 동료 문학인들의 충고를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의 충고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전제 하에서 충고를 하겠다고 이랬거든요. 10년, 20년 사이 변화도 막 심하고 내일 어떻게 될지 자연 현상까지 포함해서 정치 제도의 변화도 그렇거니와 누가 감히 자신을 가지고 예견하고 그에 따라오는 삶에 대해 권고를 하거나 충고를 자격이 없다고 봐요. 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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