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월 언론인 강제 해직이 단행된 후 4개월 뒤인 11월 전국 64개 언론사 가운데 44개사가 자진 폐간하거나 경영권이 다른 언론사로 넘어가는 이른바 ‘언론 통폐합’이 전격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그 진상은 신군부 세력에 의한 ‘언론 대학살’의 제 2막이 시작된 것이었다.

언론 통폐합은 비록 시기적으로는 5공 정권이 창출된 이후 단행되었고 또 형식적으로는 언론계의 자율결의인 것처럼 비쳐졌지만, 그 실상은 권력 찬탈을 도모한 신군부 세력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1988년 언론 청문회와 당시 관계자의 증언 및 자료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신군부 세력이 언론사 통폐합을 통해 노린 목적이 무엇인지는 언론인 강제해직 직후인 7월 31일 문공부가 일간지를 제외한 정기간행물을 무더기 등록취소한 조치에서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문공부는 당시 ‘부조리·외설·사회불안’을 조성하는 주·월·계간지 등 정기간행물 1백72종을 ‘사회정화’라는 명분 아래 등록취소했다. 이 수치는 전체 정기간행물의 12%에 달했다. 이 가운데는 <기자협회보> <월간 중앙> <창작과 비평> <뿌리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등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정론성 잡지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어 문공부의 저의가 사이비 정기간행물의 정화를 구실로 저항적인 정기간행물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언론사 통폐합 문제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6월경이며, 언론인 강제 해직도 이때 함께 계획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당시 이같은 ‘언론 대학살’ 방안을 계획하고 입안한 주무 부서는 보안사 언론대책반과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였다.

언론대책반(반장 이상재)은 1980년 봄부터 언론계·학계·관계 등에서 넘겨받은 통폐합안들을 토대로 8∼9월에 그 기본 골격을 완성해 ‘건전언론육성종합보고방안 보고서’를 작성하고, 10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이 보고서를 청와대에서 브리핑했으나 그 시행은 일단 보류됐다.

1988년 언론 청문회에서 폭로된 이 문건은 언론사 통폐합의 기본 목적이 신군부 세력의 권력 장악과 유지에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당시 언론은 계엄과 보도 검열 아래에서 타율적인 협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나 30%의 잠재적인 저항세력이 계엄령 해제 후에는 표면화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언론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못박고 있다.

즉 통폐합의 목적은 ‘건전 언론의 육성’이란 명분 아래 ‘언론의 저항 체질을 자율적인 협조 체질로 바꾸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보안사 언론대책반과 별도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회에서도 언론통폐합 계획이 진행됐다. 문공분과위원회는 허문도 문공위원의 주도 아래 6월경 언론인 숙정과 언론기관 정비(통폐합)를 골자로한 ‘언론계 정화·정비계획’을 작성하고, 그후 이 문건에서 언론인 숙정만을 따로 떼어내어 ‘언론계 자체정화계획’을 수립해 이광표 문공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허문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보안사의 ‘건전언론육성종합보고방안 보고서’ 브리핑 직후인 11월 최종적으로 ‘언론창달계획(안)’을 작성하고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았다. 이후 보안사(사령관 노태우)는 11월 12일 통폐합안을 전격적으로 집행하고 나섰다.

이처럼 신군부 세력에 의해 치밀하게 사전 계획돼 온 언론사 통폐합은 언론인 강제해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형적으로는 마치 언론계의 자율결의에 의한 것처럼 철저히 포장돼 진행됐다.

1980년 11월 14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발표해 전국의 신문사·방송사·통신사의 대대적인 통폐합을 통한 언론구조개편을 실시할 계획임을 결의했다. 그 내용은 ‘우리 언론이 지난 날의 잔재와 불합리한 요소를 제거하고 공익을 우선시키는 근대적인 공론기관으로서의 체제를 갖추도록 자기 혁신을 단행한다’는 요지였다.

양 협회는 결의문을 통해 “우리나라에는 구미 각국과 비교해 너무 많은 신문·방송사가 난립해 왔으며 이로 인해 언론이 각계 국민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쳐 왔고 사회적 적폐 또한 적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언론기관의 과점화는 공익에 배치되므로 개인이나 특정 법인이 신문과 방송을 함께 소유함으로써 민주적 여론조성을 저해하는 언론구조는 마땅히 개편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언론통폐합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신문사·방송사·통신사의 통합 및 흡수 정비, 공영방송 체제로의 전환, 단일통신사 설립 등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같은 자율 결의가 철저히 신군부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 사후처방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은 누가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의문 발표 이틀전인 11월 12일에 언론통폐합 대상 언론사 대표들은 보안사에 끌려가 강압적인 분위기 밑에서 이미 포기 각서에 반강제적으로 서명한 상태였다. 또 결의문건 자체도 이수정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직접 작성해 당일 양 협회에 전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의문 발표 바로 다음날인 11월 15일 통폐합 대상인 신문·방송·통신사들은 일제히 양협회의 ‘결의문’을 사고로 내보내고 그 즉시 각 사별로 구체적인 통합내용을 지상 또는 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언론사 통폐합은 12월 15일까지 모든 실무작업을 마무리짓고 1981년 1월 1일부터는 새롭게 개편된 언론구조에서 5공언론의 첫걸음이 내딛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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