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방송법에 대한 공보처의 태도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음모와 술수의 냄새가 나기도 하며, ‘문민정부 최장수 장관’의 부처 다운 오만방자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아예 ‘직무유기’에 가까운 자세다.

정부입법안인 통합방송법안은 지난해 12월 초 ‘강행통과’ 직전 상정이 철회된 바 있다. 당시 철회의 변은 ‘무리한 통과에 따른 부작용의 최소화’와 ‘보다 폭넓은 여론수렴’이었다.

그로부터 어느덧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합리적 통과’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나 ‘폭넓은 여론수렴’을 위한 공개적·공식적 절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반 년의 시간은 ‘재격돌’에 대비한 냉각기 또는 휴지기였을 뿐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공보처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반 년의 시간을 보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비공개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각계의 의견을 들었을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일간신문·방송사의 미디어 담당기자들과의 ‘대화’를 가졌다는 것이다. 방송노조와도 어떤 형태로든 의견교환을 나눴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같은 ‘대화’들은 철저히 비공개·비공식적인 것들이다. 공보처는 기자들과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진행된 ‘대화’도 가능한 한 외부로 알려지길 꺼려했다. 이같은 ‘대화’들은 ‘의견수렴’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공보처의 이같은 자세는 외부 여론이야 어떻든 짜여진 목표대로 움직여 나가겠다는 오만함으로 비쳐진다. 최소한의 ‘대화’도 법안통과를 가로막으려는 ‘세력’들의 의지나 결의 수준 따위를 타진해보려는 의도일 뿐 무슨 ‘여론수렴’따위와는 거리가 멀다고 파악된다.

공보처는 통합방송법안을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재상정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는 7월 상정이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기간은 1개월 남짓 뿐이다. 지난 반 년을 허송세월 한 공보처가 새삼 이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보처는 ‘폭넓은 여론수렴’을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어떠한 절차를 통해 여론을 수렴하겠다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상황이 이런 터이니 통합방송법안에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집단 사이의 갈등과 혼란은 날이갈수록 가중돼가고 있다. “그저 공보처장관의 처분에 따를 뿐”이라는 냉소적 반응도 나오고 있다. “밀실행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도 설득력을 더해간다. 통합방송법의 모양새에 따라 위상과 처지가 달라질 여러 방송관련 기관들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도 가관이다.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공보처에 있다.

이제 남아있는 시간은 불과 한 달이다. 공보처는 지금이라도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시민·사회단체, 각 방송사 및 방송관련 기관, 학계, 언론계 인사등이 한자리에 모여 충분하게 논의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는 판을 마련해야 한다.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게 바른 길이다. 굳이 7월 상정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없다.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모두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하여 모두의 의견이 고루 반영된 제대로된 법안이 상정되어야 한다.

공보처의 일은 공보처 장관이나 관료들의 입장이 담긴 법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민 모두를 위한 최상의 법안이 나올 수 있도록 논의 장을 열고 여론을 모아내는 일이 그들의 몫이다.

장관을 비롯한 공보처 관료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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