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대선에서 닉슨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담당했던 윌리엄 새파이어는 1973년 뉴욕타임스로 자리를 옮겨 칼럼니스트가 된다. 뉴욕타임스의 논조가 너무 진보적이라고 판단한 사주의 균형 맞추기용 보수논객 채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거캠프인사의 언론인 변신을 기자들이 그냥 받아들일 리 만무했고, 새파이어는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따돌림 당했다. 사직을 고려하던 그의 처지는 그러나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변하게 된다.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

민주당 선거캠프는 물론 기자들까지 도청대상이 된 사실이 폭로되자 새파이어는 자신의 칼럼으로 닉슨을 그야말로 불같이 공격했다. 그가 정파적 이해에서 독립돼 있다는 점을 확인한 기자들은 그제야 그를 동료로 인정했고 그로부터 32년 뒤 은퇴하기까지 새파이어는 미국 보수주의를 대변한 명 칼럼니스트로 활동을 이어갔다.

2012년 민간인 사찰이 화두가 된 한국에선 정반대의 ‘새파이어’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불같은 비판을 택한 새파이어와는 달리 ‘중계’와 ‘기계적 균형’이라는 일견 세련된 저널리즘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지난달 20일 ‘내가 몸통’이라는 이영호 전 청와대 비서관의 폭로가 있었던 날 이를 다룬 MBC 뉴스데스크 톱리포트를 보자. 기사문의 모든 문장의 주어가 이 전 비서관일 정도로 “윗선은 없다”는 기자회견문 요지를 낭독하듯 전하고 있다. 심지어 “민간인 사찰은 애초부터 없었다”거나 “야당총재와 공개토론을 하자”는 허황된 주장까지 아무 가치판단 없이 그대로 중계했다.

민간인 사찰문건 폭로와 청와대의 반박이후 나타난 보도양상도 중계저널리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폭로된 사찰문건의 80%는 참여정부의 것이었다는 청와대의 반박을 대부분의 언론들은 그대로 중계했고 이로 인해 민간인사찰이란 이슈는 ‘현 정권의 명백한 과오’에서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 없는 ‘논란의 영역’으로 옮겨가게 됐다. 청와대의 반박회견이 있었던 지난달 31일과 지난 1일 을 보자. 청와대 회견을 그대로 요약한 톱 리포트에 이어 여야의 반응을 엮은 후속 리포트가 붙는, 즉 ‘반박은 중계하고 이슈는 논란화’하는 배치가 이틀 연속 이어졌다. 특히 청와대가 참여정부의 것이라고 주장한 ‘80퍼센트 문건’의 대부분이 정상적인 감찰자료였다는 점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야당의 ‘주장’으로만 짧게 서술되고 만다.
 

   
 
 

물론 선거전 보도에서도 이 방식은 그대로 이어진다. 여당의 선거유세 보도라며 박근혜 새누리당 위원장의 민생탐방이 단독 리포트로 완결성 있게 중계된다. 반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그리고 자유선진당 등은 한 리포트로 묶여 종합되곤 한다. 그런가하면 정치경력은 물론 여론조사 지지율도 현격히 차이 나는 문재인 후보와 손수조 후보 간의 선거전이 기계적 균형을 맞춘다며 ‘불꽃 튀는 양자 대결’로 보도되기도 한다. 

   
 
 

비리를 감추는 주장을 일방적으로 중계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찬반 논란으로 물타기하는 것이 결코 객관적일 리 없다. 이런 중계 혹은 기계적 균형 보도기법이 처음 나왔던 미국에서조차 객관저널리즘이 단순 중계나 방송시간의 동등한 제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판정난지 이미 오래됐다. 미국의 저널리즘도 기계적 균형은 현실을 왜곡시킬 뿐이라는 공감대 아래, 대신 보도의 진실성과 취재대상으로부터 독립성을 객관성 판단의 잣대로 삼고 있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가장 큰 존재의의는 시민들이 자치(自治)를 실현할 수 있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거 보도가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공정언론을 되살리겠다고 떠난 동료들의 빈자리에서 중계와 기계적 균형의 보도를 양산하고 있는 ‘남은 기자들’. 그들에게 정치인에서 언론인으로 거듭난 윌리엄 새파이어의 선택을 눈여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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