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6월 24일 베이징의 칭화(淸華 청화)대학 부속 중학교(중, 고등학교)에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자보 제목은 ‘무산계급 혁명 조반정신(造反精神)정신 만세’라고 씌어 있었다. 대자보 내용은 이랬다. (주석 426)

“혁명은 자오판(造反 조반; 반역, 항거, 저항을 뜻함)이다. 마오쩌둥 사상의 영혼은 바로 조반이다.”, “조반하지 않으면 100분의 100이 수정주의(修正主義)가 된다!”, “수정주의 학교통치가 17년이 되었다. 지금 조반을 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인가? 우리들은 이미 조반을 한 이상 당신들을 따를 수 없다! 전투의 기미가 짙어지고 있다. 폭파통과 수류탄을 갖고 나가 대격투, 대결투를 벌이자! 무슨 ‘인정(人情)’이고, 무슨 ‘전면(全面)’인가, 모두가 힘차게 나아가자.”-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紅衛兵)

대자보 끝머리에 ‘홍위병(紅衛兵)’이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세상에 홍위병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처럼 마오의 사회주의 국가를 보위하는 위병(衛兵)으로 자처한 ‘홍위병’은 칭화대학 부속중학교 학생들이 처음 만들어 문화대혁명에 참가하는 자주적 조직의 이름이었다. 홍위병의 이름은 이후 중고등학교와 대학으로 급속히 번져 너도나도 홍위병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전위대’의 대명사가 되었다. 홍위병의 이름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에 알려져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위병은 정치적 산물의 태생적 한계로 자주적 조직체였지만 꼭두각시로 전락해 문화대혁명 동안 악명을 떨쳤다. 홍위병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했다.

마오가 베이징에 돌아온 뒤 칭화대학 부속중학 홍위병들이 두 장의 대자보를 마오에게 보냈다. 마오는 7월 31일 칭화대 부속중학 홍위병들에게 이렇게 답신을 썼다. (주석 427)

“두 장의 대자보는 착취당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 농민, 혁명지식분자와 혁명당파가 지주계급, 자산계급, 제국주의, 수정주의와 그들의 주구에 대해 분노와 성토를 설명하고 있다. 반동파에 대한 조반유리(造反有理; 항거에는 이유가 있다)를 설명하고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마오는 답신을 발송하지는 않았으나 8기11중전회 문건으로 인쇄해 배포했다. 이에 따라 이런 내용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대학교와 중고등학교에 급속하게 전파됐다. 이에 고무돼 전국의 각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홍위병조직의 열풍이 폭풍처럼 거세게 일면서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홍위병들은 ‘혁명무죄, 조반유리(革命無罪, 造反有理)’의 초법적 구호를 외치면서 사회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광란적 행위를 당연시했다. 마오가 홍위병을 지지하는 이유는 젊은 학생들이 옛 사상의 영향을 적게 받아 생기발랄하고 용맹하다는 점을 들었다. 마오는 주변의 공작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석 428)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군중들 가운데 가장 주요한 것은 청년 학생들이다. 그들이 직접 투쟁의 엄중성을 체험하고, 그들이 체득한 경험을 미래의 후손들에게 전해 중국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수 있다. 내가 군중을 발동하는 것은 비판적인 무기를 군중들에게 주어 군중들이 운동을 하면서 교육을 배우고, 그들의 능력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어떤 길을 가야하고, 어떤 길은 가서는 안 되는지를 알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법을 시험해 나도 실패에 준비하는 것이다. 현재 군중발동이 이뤄졌다. 나는 대단히 기쁘다. 그들은 나의 방법에 동의했다.”

류샤오치는 베이징대학에서 문화대혁명(문혁)의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한 1966년 6월 3일 학생들의 무질서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했다. 류샤오치는 이 회의에서 도출한 8개항의 지시사항을 베이징대학 당위원회에 하달했다.

주요내용은
1) 대자보는 학교 안에서만 부착한다.
2) 회의는 공작이나 면학분위기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
3)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것을 금지한다.
4) 학내외를 구별해 외국인의 참관과 외국학생들이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불허한다.
5) 비판대상을 적발하기 위해 집안을 뒤지는 등의 소란행위를 불허한다.
6) 비밀보호에 주의한다.
7) 구타를 불허한다.
8) 자리를 지키며 적극적으로 (학생들을)이끌어 나가도록 한다 등이었다.

중앙은 이날 허베이(河北 하북)성위원회 서기 장청셴(張承先 장승선)을 조장으로 한 공작조를 베이징대학에 급파해 당위원회 직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중앙은 또 각 대학과 중학교에 공작조를 파견해 무질서한 학내활동을 바로잡도록 지시했다. 중앙의 공작조들이 각 학교에 진입해 공작활동을 폈으나 상황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이징대학의 경우 학생들은 18일 비판 대상자를 적발해 일정한 장소에 설치한 비판대에 올려놓고 성토하는 ‘따구이타이(打鬼臺 타귀대)’, 규찰대(糾察隊) 등을 만들어 운용했다. 홍위병들은 비판할 사람들을 적발하기 위해 시내 곳곳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뒤 짐질하는 불법을 자행했다. 불순분자들은 이때다 싶어 홍위병들의 틈에 끼어들어 선동하는 등 설쳐대 폐해가 더욱 컸다. 이날 베이징대학에 공작조장으로 파견된 장청셴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석 429)

“이날 오후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60여 명이 비판을 당했다. 다수가 간부들이었다. 비판 대상자들의 머리에는 큰 고깔모자가 씌워지고 얼굴은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그들은 몸에 대자보를 붙이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판하는 학생들이 그들의 머리칼을 길게 헝클어 놓았고, 옷을 찢었으며, 손과 발로 마구 구타하고 조리돌림을 했다. 더욱 심한 것은 여성들을 부랑인 행위를 하도록 하는 모욕을 가했다. 나중에 조사한 결과 이런 패악을 저지른 사람들 중에는 국민당군으로 있다가 포로로 잡혔던 사람, 절도행위로 학교에서 축출된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홍위병들의 무질서한 혼란상을 바로잡기 위해 중앙에서 공작조를 파견했으나 베이징의 일부 대학과 중학교에서는 정부가 파견한 공작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충돌사태까지 발생했다. 이런 움직임은 더욱 번져갔다. 베이징사범대학과 베이징지질학원 조반파 학생들이 6월 20일 학내에서 공작조를 내ㅤㅉㅗㅈ는 일까지 나타났다. 21일에는 칭화대에서 공작조 반대사건이 발생했다. 공정(工程)화학과에 다니는 20살의 청년 콰아이다푸(蒯大富 괴대부)는 이날 담벼락에 붙어있는 대자보 빈자리에 “지금 권력은 공작조의 수중에 있다. (공작조는)우리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다시 권력을 탈취하여야 한다”고 써 넣었다. 콰아이다푸는 며칠 전에 공작조 축출을 주장한바 있었다.

칭화대 조반파는 24일 공작조 파견 반대집회를 열고 공작조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공작조장인 예린(葉林 엽림)은 “콰아이다푸가 공작조의 권한을 탈취하려는 것은 반 혁명행위”라고 강력 비판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학생과 선생들이 26일 칭화원에서 ‘공작조를 옹호’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여 충돌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대학가와 중학교에서는 조반파와 정부가 파견한 공작조가 날카롭게 맞서 충돌하면서 폭력사태로까지 번지는 등 혼미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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