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현 문화기획자 ⓒ박영록
▲ 이충현 문화기획자 ⓒ박영록

배리어프리(barrier free)는 1974년 국제연합(UN) 장애인생활환경전문가회의에서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 design)’에 관한 보고서가 나오면서 사용된 말이다. 이제는 흔히 접할 수 있는 장애인 화장실이나 저상버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배리어프리는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턱을 조정하고, 테이블이나 싱크대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장애 유무와 관계없이 영화나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자막이나 수어 통역, 음성해설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완전한 배리어프리는 불가능하다. 삶의 조건과 맥락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배리어는 단지 시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건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 즉 장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 접근성을 높여가는 과정에서 장벽을 허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장벽을 구성하는지 예민하게 살피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문화기획자 이충현은 ‘접근성 매니저’로도 불린다. 문화에는 윤리가 동반돼야 한다고 믿고, 결과뿐 아니라 과정을 잘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동료들과 ‘조금다른 주식회사’를 만들어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 현장’의 접근성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접근성 매니저로 활동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공연을 즐기러 모이는 서울 혜화동에서 그를 만났다.

-‘조금다른 주식회사’ 멤버인데, 어떤 곳인지 소개해달라.

“함께 활동하던 동료들과 만든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지구 위 모두가 차별 없이 고유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세상’을 꿈꾼다. 2016년 ‘조금다른운동회’라는 프로젝트로 모여서 느슨하게 활동하다가, 조금 더 확실하게 집중해 보고자 지난해 2월 만들었다. 조금다른 주식회사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조금다른운동회 같은 장애 인식 개선 기획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예술계에서 접근성을 개선하는 작업이다.”

-‘조금다른운동회’는 어떤 활동인가?

“놀이형 장애 인식 개선 워크숍이다. 보통 장애 인식 교육은 강사가 강의를 한 후 휠체어를 타보거나 눈을 가리고 계단을 올라가 보는 정도의 체험을 한다. 교육이라면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런 방식이 나에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더 재미있게 해보자는 취지로 운동회 형식으로 장애 인식 개선 워크숍을 만들었다.”

-‘접근성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나?

“접근성 매니저란 어떤 행사나 프로젝트의 기획, 진행, 평가 등의 과정에서 접근성에 집중하는 이들을 칭한다. 접근성이라는 말은 익숙하지만 낯설다. 접근성에 관한 여러 용어가 있는데, 우선 배리어프리(barrier-free)는 장벽을 허문다는 뜻으로 건축업계에서 먼저 사용했다. 장애인이나 노인·어린이 등 이동 약자들이 계단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며 벌어진 사회운동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배리어프리가 완전히 적확한 단어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배리어(장벽)를 인식하자는 뜻의 배리어컨셔스와 접근성이란 단어도 쓰고 있다.”

-배리어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더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리어를 개선하더라도 청각장애인, 이동 약자 등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배리어가 존재할 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 배리어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예를 들어 하단에 조그맣게 들어간 수어 통역 화면이 수어를 제1언어로 하는 농인의 접근성은 어느 정도 개선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너무 작기도 하고, 모든 청각장애인이 수어로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조건과 맥락은 개인마다 너무 다르다. 완전한 배리어프리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그렇게 나왔다. 그래서 배리어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접근성을 높여가는 일, 베리어컨셔스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누리집 갈무리
▲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누리집 갈무리

-지난해 기획에 참여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공식적으로 92명의 장애인 관객이 찾았다. 총 9000여 명의 관객이 들었으니 장애인 관객은 백 명 중 한 명인 셈이다. 접근성 개선이 단지 1%의 관객을 위한 것 아니냐고 보는 이들도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개선 노력은 사실 모두를 위한 접근성 개선으로 귀결된다. 자동문이 처음에는 문을 열고 닫는데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누구에게나 편한 것과 마찬가지다. SPAF에 왔던 한 비장애인 관객이 데스크에 설치된 접근성 테이블을 보고 질문하고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장애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접근성은 1%를 위한 작업이 아니다.”

-‘접근성’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그중 창작자가 고려할 수 있는 접근성은 크게 정보 접근성, 장소 접근성, 미학 접근성 3가지다. 미학 접근성의 경우 음성해설을 예시로 들어보자. 공연 창작자가 음성해설을 하겠다고 결정하면 기획 과정이 꽤 복잡해진다. 예술가의 연출 의도가 있는데 음성해설에서 어떤 정보를 얼마나 포함할 것인지 협의하는 데 오래 걸린다. 음성해설 말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배우가 할 수도 있고 제3의 음성 해설자가 할 수도 있다. 모든 관객에게 들려주는 개방형, 원하는 관객에게만 들려주는 폐쇄형, 1:1 맞춤 해설인 위스퍼링 등 대상에 따라 형태도 달라진다. 사전 음성해설로 미리 완료할 수도 있다. 만약 연극에 자막을 넣는다면 어떤 타이밍에 넘겨야 한다고 생각하나?”

▲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연장 안내 영상 갈무리
▲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연장 안내 영상 갈무리

-대사 사이에 빨리 넘겨줘야 하지 않을까?

“그건 청인들의 관점이다. 자막은 수어 통역 속도에 맞춰야 한다. 수어 통역사는 항상 발화보다 늦을 수밖에 없다. 청인 입장에서 ‘지금 자막은 지나간 대사 아닌가?’ 싶은 타이밍에 나와야 맞다. 농인은 수어 통역과 자막을 동시에 보는데 서로 다른 정보가 나오면 곤란하고, 속도가 다르면 스포일러가 되기도 한다. 수어 통역과 한국어는 엄연히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100% 번역이 되진 않아 ‘수어에서 번역한 내용이 자막으로는 이렇게 표현되는구나’라고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럼 접근성 매니저는 어느 단계에서부터 제작진과 소통하나? 역할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보통 ‘배리어프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얼마 필요하나?’ 등의 문의를 한다. 그럼 우린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알려달라고 한다. 배리어프리가 아닌 배리어컨셔스 관점에서 보면 접근성 작업은 끝이 없기에 어느 정도 비용을 들일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와 빨리 만날수록 좋다.”

-공연을 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겠다.

“음성해설로 예를 들면, 대본에 음성해설 요소를 추가할 수도 있다. 배우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원래는 이동한다는 내용을 음성해설로 넣어줘야 하는데 제작 단계에서 잘 고민해서 처음부터 이동 내용을 대본에 포함하면 공연에 녹일 수 있다. 대체로 창작자들은 배리어프리를 버거워한다. 비용을 많이 들여 배리어프리 공연을 준비했는데 막상 장애인 관객이 하나도 없는 경우도 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문제다.”

-공간 접근성, 미학 접근성은 알겠는데 정보 접근성은 무엇인가?

“연극은 개인이 저예산으로 준비하는 경우가 많아 혜화동에 있는 소극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공연장은 접근성이 떨어진다. 대신 어떤 장벽이 있는지 알려주는 방식이다. 계단의 폭과 개수, 휠체어석의 유무, 전동 휠체어의 출입 가능 여부, 이동 지원 매니저 배치 유무와 신체 접촉 등의 유의 사항, 장애인 화장실 유무와 인근에 위치한 장애인 시설 정보 등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공간 접근성은 비용이 많이 들고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런 점에서 정보 접근성이 꽤 중요하다는 걸 알겠다.

“너무 밝은 빛이나 소리, 너무 어두운 조명이 누군가에겐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안내를 글이나 이미지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시각장애인도 확인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계단이 있는 공간이라서 죄송하다’는 식으로 사과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 그러면 오히려 찾아가기 불편한 공간이 될 수 있다. 뚜렷하게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등 공간 접근성 개선과 동시에 정보 접근성을 잘 녹여내는 게 필요하다.”

▲ 이충현 문화기획자 ⓒ박영록
▲ 이충현 문화기획자 ⓒ박영록

-접근성 매니저로 일하면서 당사자성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을 텐데.

“난 지금은 비장애인으로 비당사자다. 소수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일이 결국 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비당사자로서 고민이 든다. 당사자는 수혜자가 아니라 주체가 돼야 한다. 그래서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도 음성 포스터를 시각장애인의 목소리로 제작하거나 수어 영상을 만들 때 당사자가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모니터링한 비평을 받기도 했다.”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한 문화기획자로서 공부는 주로 어떻게 하나?

“선례가 많진 않다. 교재도 없고. 일단 창작자끼리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장애인 당사자의 모니터링을 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획의 전반과 공연 직전·직후 등 모든 과정에서 전부 다른 피드백이 필요하다. 연극 리허설을 함께 보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평가받는다. 접근성 개선은 정답이 없다. 그래서 아카이빙 작업이 중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은?

“‘계획된 우연’이란 말이 인상 깊어 기억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우연한 기회가 올 수 있지만 준비가 돼 있느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선택한다. 흘러오는 대로 살았지만 선택할 만한 이유를 만들며 살아왔다. 조금다른 주식회사로 아직 먹고살 만큼 돈을 벌지 못하고 있어서 돈도 벌어보고 싶고 계속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 이 인터뷰는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가 참여연대 월간 매거진 ‘참여사회’ 인터뷰어로 참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참여사회 2024년 4월호(통권 314호)에 실렸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미디어오늘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인용 시 ‘참여사회’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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