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4일, ‘무늬만 프리랜서’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의 죽음으로 ‘계약서 한 장’ 쓰지 못하는 미디어 노동자 실태가 떠올랐다. 4년이 흐른 지금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법적 다툼과 노동조합 가입 시도 등으로 권리를 찾으려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의 외면은 논쟁적 화두다. 이는 때로 사측이 비정규직 노동권 개선 요구를 거부하는 핑계로 활용되고, 전국언론노동조합 산하 지부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다툼을 가로막는 사례도 드러났다.

그러나 미디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를 시도한 사례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지난해 언론노조 EBS지부의 청소노동자 연대투쟁이 일례다. 외주(비정규직)와 재직(정규직) 노동자가 함께 가입한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는 ‘모든 조합원은 평등하다’는 강령과 조합원의 반노동행위를 징계할 수 있는 규약을 신설했다.

미디어오늘은 미디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미디어자본을 상대로 함께 싸우기 위한 실마리를 모색하고자 지난 15일 집담회를 진행했다. 김원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사무국장(북디자이너), 김태봉 언론노조 EBS지부 부지부장(촬영감독), 박명수 언론노조 MBC방송차량서비스지부장(방송차량기사), 익명을 요구한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조합원 정현정(가명) 작가 등이 참여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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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노동자들이 게시판에 EBS 청소노동자(공공운수노조 경기지부 EBS분회)들의 해고에 맞선 투쟁을 연대하는 메시지를 붙였다. 사진=윤유경 기자

- 언론노조 EBS지부의 지난해 청소노동자 연대 투쟁은 언론노조 내 의미있는 연대 사례로 꼽힌다.

김태봉 “작년 2월쯤 사측이 경영난 대책 중 하나로 ‘미화랑 보안 용역비 절감’을 발표했다. 막연히 ‘일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다’ 생각하고 여쭸다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고 충격을 받았다. EBS가 비용을 3억4000만 원 넘게 깎아 신규 용역업체 입찰공고를 준비했다. 인원도 27명에서 24명으로 줄이고, 노동자 급여는 15% 줄고, 전보다 짧은 시간에 같은 업무량을 해내야 했다. 이후 노사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경영진에 문제 제기했고, 노조 게시판에 개인 명의로 글을 올렸다. 미화 동지 한 분이 노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언론노조에 상담을 했다. 공공운수노조와 언론노조, 저, 미화 동지들이 논의한 끝에 공공운수노조 가입(경기지부 EBS분회 설립)이 결정됐다. 노조 출범 이튿날 새 용역업체는 원청과 계약도 하기 전에 분회장과 부분회장, 사무국장 3명을 찍어 해고 통보하면서 투쟁이 시작됐다. 해고자와 고용승계자 모두 피케팅이나 출근길 선전전을 했고, 연대 기자회견과 투쟁 결의대회를 했다. 해고 문제는 ‘해결’이 아니라 ‘정리’됐다. 회사가 감축한 인원은 그대로, 임금 축소도 그대로다.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신 분들의 빈 자리에 해고된 간부들이 복직했다.”

▲6면_EBS 로비에서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경기지부 EBS분회. 사진=언론개혁시민연대
▲EBS 로비에서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경기지부 EBS분회. 사진=언론개혁시민연대

-지부 조합원이 EBS분회 지지 활동에 반대하지는 않았나?

김태봉 “지부 내 조심스러운 시각이 있었다. 경영난에 ‘우리 코가 석자다’ ‘네가 제대로 하는 일이 뭔데 남 일까지 신경쓰느냐’는 문제 제기를 블라인드(익명 직장인 커뮤니티)나 뒤에서 한다고 들었다. 직접적으로 내게 따지는 경우는 없었다. 미화 동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러워도 했다. 정규직의 ‘우리 코가 석자’라는 주장도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사람은 그럴 수 있다는 거다. 그렇기에 비정규직 노동 문제는 노조 집행부 내 한두 사람의 선의에 기댈 일이 아니다. 낙수 효과처럼 이른바 ‘곳간이 풍족해야’ (함께 싸울)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산별노조라는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김태봉 언론노조 EBS지부 부지부장. 사진=정철운 기자
▲김태봉 언론노조 EBS지부 부지부장. 사진=정철운 기자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비정규직·프리랜서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미디어 자본이 그 비중을 늘리는 상황에서 언론노조 운동 방향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언론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다고 느끼나.

박명수 “EBS지부가 미화노조 투쟁을 돕는 게 진정한 노조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MBC도 정직원 1600명 외 프리랜서, 청소, 운전기사 등을 합하면 어마어마하다. 노조가 이들에게 하나로 힘을 실어주면 좋은데, 그게 잘 안 된다. (언론노조와 MBC본부에) 아무리 외치고 떠들어도 메아리도 오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노조로 있어도 큰 의미가 없다. 스스로도 많이 지치고, 세월만 간다고 느낀다.”

정현정 “이동관과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이 법원의 판례에도 ‘2인 불법 체제’로 의결을 강행해 언론노조 비판을 받지 않나. 그러나 그런 태도는 방송사도 똑같다. 보도국 작가들이 주로 이 이슈를 겪었는데, 작가를 노동자로 인정하라는 판결이 거듭 나와도 방송사는 절대 같은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한 직군을 만들고, 연봉을 최소화한다. 언론노조는 여기에 어떤 대응을 했나. 또,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언론 탄압이 엄청 심했지 않나. 우리도 언론인이고, 같이 방송을 만들고 사회 문제에 관심 갖고 접근하는 이들이다. 우리를 배제하고 정규직 조합원들끼리만 모여 싸운다면 파괴력이 없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방송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인정을 했다면 다 같이 싸울 수 있지 않았을까.”

▲박명수 언론노조 MBC차량서비스지부장. 사진=정철운 기자
▲박명수 언론노조 MBC차량서비스지부장. 사진=정철운 기자

“한두 명 선의 아닌, 산별노조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외쳐도 메아리 없어…노동자로 한목소리 내야”

- 지난해 말 언론노조 주최 토론회에서 ‘언론노조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대안이 나왔다. △ 비정규직 조합원의 정규직 지·본부 가입 승인 △비정규직 차별 문제 공론화 캠페인 △언론노조 지·본부의 반노동 행태 책임 묻기 등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언론노조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나.

김태봉 “미화노조(EBS분회) 출범을 지켜보며 제가 입사와 동시에 노조 가입한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노조가 없어 탄압당하고, 만들자마자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모습을 보며 난 운 좋은 거였구나 느꼈다. 왜 연대가 필요하고, 노동운동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는 조합원들이 많을 거다. 그런 점에서 (언론노조 차원의) 교육사업도 필요하다.”

김원중 “(언론노조 근본 과제는) ‘정규직 텐트’ 안에 비정규직이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미 출판업계는 초대형 사업장과 매우 작은 사업장으로 양극화했다. 사업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실효가 다했다. 여기에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노동자들이 들어온다. 언론노조가 지금의 형태와 가치로 이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거다. 언론노조 사무처도 대규모 사업장 지·본부 조직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언론노조 상근활동가를 파트너가 아니라 아랫사람으로 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익단체가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건, 결국 내 노동도 귀하고 네 노동도 귀하다는 점을 일깨우고 맞춰나가기 위해서다. 체질을 바꿔야 한다. 고용 형태에만 집중해 벽을 두어선 안 된다. 더구나 업계 절반이 비정규직이라면, ‘공동의 결과물을 만드는 동료’라는 테두리로 묶어야 언론노조에 미래가 있다.”

▲김원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사무국장. 사진=정철운 기자
▲김원중 언론노조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사무국장. 사진=정철운 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지난해 6월8일 경기 일산 EBS 사옥 앞에서 EBS의 청소노동자 해고를 규탄하고 고용승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결의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윤유경 기자.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지난해 6월8일 경기 일산 EBS 사옥 앞에서 EBS의 청소노동자 해고를 규탄하고 고용승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결의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윤유경 기자.

정현정 “지부가 아니라 개인 의견이다. 우리가 언론인이라는 점을 언론노조에 들어가야 인정받을 수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다만 방송스태프지부에서 꾸준히 주장하는 바는 있다. 정규직 노조가 외주제작사 공모를 받을 때 계약서 작성을 의무화하고, 결방 피해를 줄이는 데 목소리를 같이 내주기 바란다. 외주제작사들은 독립 PD든 작가든 계약서를 안 쓰고 일하는 경우가 95% 이상이다. 나도 TBS에서 일할 때를 빼고는 18년 간 한 차례도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박명수 “언론노조 안에도 격차가 있다면 그건 끝난 거라 생각한다. 근본이 깨졌기 때문이다. 인원이 몇 명인지는 의미 없다. MBC본부, KBS본부, SBS본부로 나눌 일이 아니다. 직종과 신분을 떠나서 노동자는 노동자 편에 서서 한목소리를 내야 변화한다.”

김태봉 “미화노조와 함께하면서 감명받은 장면이 있다. 공공운수노조가 주축이 돼 EBS 앞 규탄대회를 하는데 하나로 엮이지 않을 것 같은, 다양한 곳에서 일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이 모였다. 미화노조는 다 와도 20명이고 다른 조직도 사람 수가 적은데, 모두 어려울 때 연대한 기억을 가졌기 때문에 담당 국장님의 전화 한 통에 모인 거다. 그 분들이 연대 현수막 100개로 EBS 사옥을 꽁꽁 싸는 모습을 지켜봤다. 미화노조 분들도 다른 집회에 참석하는 사진들을 보내주신다. 거기에서 연대의 힘, 노조의 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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