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다시보기, 유튜브, OTT 서비스는 ‘실시간 방송(on air)’ 의미를 퇴색시켰다. 그래도 텔레비전의 종말을 말하기엔 섣부르다. 상상력을 보태자면, 몇 십 년 전에 대기 속으로 날린 방송이 흡사 은하계의 별빛처럼 이제야 도착해 오늘의 현실을 비추는 가시광선이 될지도 모른다. OTT 서비스 웨이브를 통해 20년 만에 다시 본 MBC 드라마 ‘아줌마’(장두익·안판석 연출, 정성주 극본, 2000-2001)가 내겐 그랬다.

‘아줌마’는 10년 째 대학 강사 생활을 하는 장진구(강석우 분)와 그로 대표되는 먹물 지식인의 위선, 주접, 속물근성을 폭로한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장진구는 386세대 일원이다. 대학 동기이자 친구이고 유학 후 바로 교수로 임용된 오일권(김병세 분)의 여동생 오삼숙(원미경 분)과 결혼했다.

사랑의 결실은 아니었다. 운명의 밤은 1987년 2월7일이다. 고주망태가 되어 친구 집에 실려 온 장진구에게 오삼숙은 지난 1월 유명을 달리했던 박종철 열사 추도집회에 다녀왔냐고 걱정한다. 당구 내기에 져 폭음했던 장진구지만 고뇌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제 옷인 것만 같다. “시대의 아픔, 살아있는 부끄러움”이 방언처럼 터져 나오고 이렇게 구한 동정과 환심으로 욕정을 채웠다가 덜컥 임신이 되었다.

오일권은 분노하고 장진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만 안도감이 더 크다. 가족의 전폭적 지원으로 유학을 앞둔 그에게 남존여비 탓에 고졸로 공부를 마감한 여동생을 안심하고 처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결국 결혼을 받아들인 장진구가 “지식인과 기층민과의 결합이란 이상의 실현”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장면에선 실소가 터져 나온다.

▲ MBC드라마 ‘아줌마’.
▲ MBC드라마 ‘아줌마’.

여기까지가 전체 54화 중 1화의 내용이다. 이것만으로도 버거운데, 386 지식인의 위선과 잘난 체에 대한 조롱은 회를 거듭할수록 더해간다. 허세 가득한 장진구 개인의 좌충우돌로만 보였던 ‘아줌마’는 점차 수위를 높여 막 학계에 진입한 소장 지식인 집단의 혹세무민을 까발린다. 연구 업적을 채우기 위한 논문 표절, 소위 잘 나가는 동기·후배에 대한 질시, 돈으로 사는 교수직, 조교와의 불륜,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에 대한 차별, 정계에 연줄을 대는 행태, 사외이사 겸직이나 내부자 정보를 통한 주가조작, 그들만의 학계 라인 만들기 등등 ‘먹물’의 악행은 차고 넘친다. 못 배웠고 모자르다고 오삼숙을 멸시하는 장진구와 그들 가족의 가스 라이팅도 끔찍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철면피다. 온갖 미사어구와 대의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먹물’의 궤변은 어느 순간 ‘아줌마’를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시대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정성주 작가는 당시 드라마 종영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의도적으로 지식인을 풍자했다고 말한다.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이기심을 충족시키는” 교수를 사례로 삼아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좇는 권력지향의 인간으로 변한” 지식인의 폐해를 곱씹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허구적 가치 체계를 까발리지만 우리사회 1%에 해당하는 계층은 눈썹하나도 까딱 안 할 거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이 읽힌다(중앙일보, “장진구 징벌한다고 세상이 바뀔까요?”에서 인용).

그리고 안타깝게도 드라마 종영 후 20년이 넘은 오늘, 큰 변화는 없었다. 표절 논문 하나 판별하지 못해 해를 넘기고, 거수기 사외이사직을 당연하듯 겸직하며, 정권 교체기 정치권의 전화가 언제 올까 노심초사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20년 전 그들의 관심사가 어떻게 교수직에 안착할 것인가였다면, 지금 그들의 관심사는 자녀의 대학진학과 진로설계다. 대학이라는 공적 자원은 교수 자녀의 논문 실적 쌓기나 인턴 체험 장소로 전용되기 일쑤다.

더불어 대학 청소노동자에게 영어 및 한자 시험을 치르게 해 인격적 모욕감을 주고도 이를 외국인 응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절차였다고 말하는 교수를 보고 있자면, 20년 전 유행어를 되살려 ‘장진구스럽다’란 일갈을 그들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올해로 강사 10년차를 맞이했다. 불현듯 ‘아줌마’가 떠올라 며칠 밤을 지새우며 정주행한 이유이다. 이제는 그들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 ‘아줌마’를 보는 내내 몸서리치게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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