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투자·제작한 영화 ‘F20’이 조현병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한다는 비판 속에 TV방영이 사실상 무산됐다. 장애인단체들은 해당 영화가 정신장애인 인권을 침해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한 상태다.

스릴러 장르인 이 영화의 제목 ‘F20’은 조현병의 질병코드를 의미한다. KBS ‘드라마스페셜’을 확장한 영화 프로젝트 ‘TV시네마’의 첫 콘텐츠로 제작돼 여러 플랫폼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난 6일 CGV, 15일 웨이브·Btv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서 개봉한 ‘F20’은 오는 29일 KBS 2TV에서 방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F20’은 개봉 전부터 정신장애인 당사자 및 가족 등의 우려를 샀다. 지난달 16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현재까지 10여건의 KBS 시청자 청원이 ‘F20’ 상영 반대를 주장했다. 영화가 개봉한 뒤엔 비판이 더 거세졌다. 지난 20일 전국의 19개 장애인단체들은 서울 KBS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F20’은) 일부 잘못된 정보의 수준이 아닌 제작의 의도자체가 조현병이 있는 사람은 위험하고 무섭고 지역사회 안에 함께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지목하고 있다”면서 상영 중단, KBS의 사과, 재발방지책 등을 촉구했다.

▲영화 'F20' 포스터
▲영화 'F20' 포스터

결국 KBS는 29일 예정된 KBS 2TV에서의 ‘F20’ 방영을 보류했다. 26일 KBS 관계자에 따르면 “(KBS 2TV에서의) ‘F20’의 방영을 보류했고 추후 방영 일시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KBS에 입장을 요구했던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계엔 이날 ‘앞으로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로서 방영 보류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장애계의 비판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셈이다. KBS는 다만 ‘F20’ 상영을 보류하는 이유, 사과나 재발방지 등 요구 등에 대해선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원래 15분 정도 문제되는 장면을 삭제했다고 했는데 이건 삭제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전했다. (KBS 측에서도) 공영방송이 이렇게까지 문제제기된 것을 방영할 순 없다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김 사무국장은 “문제는 OTT”라고 강조했다. 여전히 Btv와 웨이브를 통해 누구나 영화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지상파 채널의 방영 보류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정당한 사유없이 장애인에 대한 제한·배제·분리·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조장하는 광고를 직접 행하거나 그러한 광고를 허용 조장하는 경우를 장애인에 대한 차별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를 비롯한 장애인단체들은 이날 국가인권위원회에 모든 플랫폼에서 ‘F20’ 상영을 중단하게 해 달라는 긴급구제를 신청했다.

▲영화 'F20' 이미지
▲영화 'F20' 이미지

‘사회의 편견과 배척’ 꼬집겠다는 기획의도, 뚜껑 열어보니

앞서 ‘F20’ 제작진은 지난달 30일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과 편견, 배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그런 장면을 단 한 장면도 찾을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104분의 러닝타임 동안 화면은 주인공인 ‘애란’의 대사처럼 “미친 게 죄”인 상황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애란은 홀로 키운 아들이 명문대 대학생이 됐다는 이유로 같은 임대아파트에 사는 주민들 사이에서 시기와 동경의 대상이다. 그런 애란은 벌레가 보이는 환시,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 환청에 시달리는 아들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보단 감추기에 급급한다.

자랑거리인 아들의 조현병이 알려질까 긴장하는 애란의 모습은 언제부턴가 광기로 바뀐다. 자신처럼 조현병 아들을 둔 경화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온 뒤엔 불안감에 환청을 듣고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근거 없는 지역주민들의 정신장애 혐오에 고통받던 애란이, 결국 자신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칼을 휘두르는 장면은 그야말로 “미친 게 죄”라는 명제를 입증하는 과정으로까지 보인다.

실제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비정신질환자에 비해 미미하다. 2015년 전체 범죄발생건수(177만1390건) 중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는 0.39%(6890건)에 불과하다. 정신질환자의 강력범죄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하지만 이 역시 전체 2.63%에 불과하다. 더구나 “조현병 등의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환자들의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정확한 통계나 정신장애와 범죄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극히 소수이기에 조현병을 포함한 정신질환과 범죄와의 연관성을 뒷받침할 근거가 빈약하다”(조현병환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에 미치는 영향, 2019, 정현정)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편견을 해소하기 위한 설명이나 장치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의 결말은 정신장애인과 그 가족의 몰락이다. 손가락질 했던 이웃들은 여전히 ‘미친사람’ 운운하며 손가락질하고, 조현병 생존자는 얼굴을 쉽게 들고 다니지 못한다. 애란이 자신이 죽인 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F20’의 ‘F’가 ‘낙제’ 아닌 ‘프렌즈’ 약자였으면 좋겠다고 회상하는 장면이 기만적인 이유다. 이 결말이 조현병 환자와 가족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가늠하긴 어렵지 않다.

▲KBS시청자청원 게시판 갈무리
▲KBS시청자청원 게시판 갈무리

극중 배경이 임대아파트라는 설정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애란은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음에도, 명문대 아들을 뒀기에 다른 취급을 받는다. 정신장애 혐오를 일삼는 이 아파트 주민은 아파트 경비원에게 삿대질을 하고, 옆에 있던 이는 그에게 ‘그러면 갑질 소리 듣는다’고 옆구리를 찌른다. 파국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의 책임이다.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제작진은) 편견을 해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런 장면을 단 한 장면도 찾을 수 없었다. 조현병을 자극적인 스릴러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신장애를 그려내는 이해 정도와 인권 인식 수준이 최악”이라고 말했다.

KBS시청자청원 게시판에는 조현병 당사자와 가족들의 글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8일 ‘조현병을 30년 동안 앓고 계신 어머니를 둔 딸’이라 밝힌 한 시청자는 “오해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그저 약물과 병동에 입원시키며 거의 가족들의 도움으로 밖에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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