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지인의 귀띔에 한 인터넷 소설을 알게 된 A씨는 애써 묻어뒀던 1년 전 기억에 다시 시달리기 시작했다. 소설을 쓴 B와 A간 벌어진 일들이 각색, 왜곡되어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A와 B는 2016년 10월 섹스콘텐츠미디어를 표방하는 ‘레드홀릭스’ 회원 모임에서 해당 플랫폼에 글을 연재하는 B를 만났다. 이듬해 1월 자신을 좋아한다는 B의 고백을 거절한 뒤 지인 사이로 지내왔지만, 같은 달 그와 술자리를 가졌다 정신을 잃은 뒤 B로부터 성관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A는 당시 성관계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뤄진 간음 피해라 주장한다.

페미니즘프로젝트그룹 ‘셰도우핀즈’에 따르면 B가 쓴 소설에선 A와 B의 실제 대화 내용이 주인공과 작중 여성 등장인물의 대화로 사용됐다. 주인공은 여성 지인과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날 기억이 없는 듯한 여성에게 ‘산부인과에 가봐야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전날 기억을 잃은 A에게 B가 했던 말이다. 주인공이 여성을 만난 날로 표현된 날짜도 A와 B가 만났던 날과 동일하다. 소설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특정 지하철역 역시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간의 관계는 A의 기억과 달랐다. 여성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성관계를 주도한 인물로, 주인공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남성 지인들과 성관계를 한 문란한 인물로 표현됐다. 주인공은 자신이 오히려 성폭행 피해를 당했지만 가해자로 몰렸다면서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이 자신의 “스토커”라 표현하기도 했다. 셰도우핀즈는 B가 실제로 같은 커뮤니티 이용자에게 ‘A는 스토커’이며 ‘소설 속 여성이 A’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설명한다.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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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소설은 2017년 9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약 4개월간 총 17회에 걸쳐 연재됐다. A는 “글이 완결되고 나서 7개월 후에 알게 됐다. 이미 볼 사람들은 다 보고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간 상태에서 확인했는데 준강간 피해보다 더 충격적이었다”며 “우울증, 무기력증에 대인기피 등이 생겨 외출을 못 하고 있었는데 공황장애까지 발병했다. 세상이 온통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고 당시 소설을 봤을 때의 심경을 전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A가 레드홀릭스 측에 요구해 해당 소설이 삭제됐지만, 커뮤니티 내부에서 A를 향한 2차 가해도 자행됐다. B가 피해 사실을 공론화 한 A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A를 비난하는 게시글이 레드홀릭스에 게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이용자는 B의 닉네임을 언급하며 “친애하는 ○○를 추억하며”라는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지난달 경찰은 A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이를 불송치한 바 있다.

다만 A가 지난해 8월 B를 준강간죄로 고소한 사건도 불기소 처분됐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은 지난해 12월 “피해자는 술이 깬 후 당시 행동을 전혀 기억 못하는 소위 ‘블랙아웃’ 상태에서 행동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등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 진술 외에 피해자 혐의를 입증할 증거자료가 부족하다”면서 B의 혐의없음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현재는 A가 지난 6월 B의 소설이 정보통신망법상 사실적시 및 허위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고소한 사건이 진행 중이다. A를 대리하는 배수진 변호사(법무법인 천지인)은 고소장에서 “A는 3년 6개월간 병원 치료만 받고 일상을 포기한 채 모든 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건강 및 심리 상태가 좋아지기는커녕 우울증은 극심하고 경제력마저 잃었다”며 “(준강간 혐의) 자기 방어에 성공한 B의 잘못을 단죄하기 위해 이 사건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고 취지를 강조했다.

셰도우핀즈는 이번 사례를 비롯해 문화 영역에서 당사자 동의 없이 실존 인물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행태를 방치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7월 김봉곤 소설가가 지신과의 대화를 무단으로 인용했다는 지인의 공개적인 비판에 소설 판매를 중단하고, 라이엇게임즈가 ‘리그오브레전드’(LoL) 캐릭터 외양 등에 자신을 도용했다는 미국 여성의 주장 등이 제기되는 사례 등을 거론하면서다. 테오즈 셰도우핀즈 활동가는 “문학, 게임 등이 현실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다 쓸 때 범죄의 영역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어야 한다”며 “특히 성인물이라는 자극적인 컨텐츠를 다루는 곳일수록 더 안전해야 범죄가 아닌 소비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실제 피해 사례가 제한 없이 소비될 수 있는 커뮤니티 운영 방식이 유지되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은 사적인 이야기가 콘텐츠화되어 돈 벌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 셰도우핀즈 주장이다. 실제 해당 커뮤니티에선 A외에도 다른 회원으로부터 오프라인에서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공론화되거나, 불법촬영 게시물이 게시돼 피해자의 항의로 게시물이 삭제되는 사례 등이 불거져왔다.

레드홀릭스 측은 실제 이용자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플랫폼인 커뮤니티의 책임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백상권 레드홀릭스 대표는 5일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에서 처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나 피해자라는 쪽 모두 상대방 측에 치우쳤다고 이야기를 한다”면서 “레드홀릭스는 주장의 신빙성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문제가 제기되면)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 뿐이다. 사법 당국, 경찰 등에 고소하거나 처리할 일”이라 주장했다.

백 대표는 이어 “책임질 부분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A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을 매장시키기 위해서, 레드홀릭스 내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걸로 알고 있다. 트라우마일 수도 있지만 과하다”는 주장도 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하고 있다”며 되레 A를 지원하는 단체 등이 A를 정말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에 셰도우핀즈는 “백상권 대표 주장은 개인적 억측이며 허위사실이다. 근거도 없이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발언이며 심각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다. 

문숙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피해자가 상심하는 경우가 피해자를 믿지 않는다거나, 피해자가 너무 과도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것 등이다. 여성이 어떻게 소비되고 성적대상화되는지, 발생한 문제를 사소하게 보는 것이 문제”라며 “디지털 성희롱, 성폭력 종류가 교묘하게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다. 이런 것이 가능하게 하는 사회에서 분명 잘못 됐음에도 제재받지 않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A는 “제가 바라는 건 저 같은 피해 유형에 대한 선례를 남기고 이런 폭력도 폭력이라고 법적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불특정 다수가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게시글을 볼 수 있는 공간에서는 피해 규모가 제한적이지 않다”며 “떠올리기 힘든 기억이지만 이야기하고 풀어내는 과정도 피해를 회복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한편 셰도우핀즈는 “2020년 8월, A는 한국여성의전화를 통해 법률지원을 받고 뒤늦게 B에 대하여 준강간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무료법률구조 원칙상 성폭력 피해에 대한 지원만 가능했기에 '명예훼손 및 모욕, 통신매체이용음란죄' 등에 대해서는 고소를 진행하지 못했다”고 밝혔으며 “B는 12월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불기소 처분되었고, A는 불복하여 항고와 재정신청까지 했지만 기각되었다. 21년 3월 말, B는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A를 역고소했으나 경찰은 두 혐의에 대해 모두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2021년 10월 현재는 B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10월9일 오전 10시35분 셰도우핀즈 입장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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