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 논문들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뉴스룸 안팎에서 했던 고민들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데 더러 위로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겠다. 언론 신뢰는 갈수록 땅에 떨어지고, 언론 혐오와 기자를 향한 공격이 횡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언론의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언론의 잘못이 있을지언정 만회할 기회가 없고, 더러 열심히 하고 있는 이들의 노고는 여기에 가린다. 기자는 기사로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수습 기사 시절부터 들었건만, 기사에 달린 수많은 악
나는 한국식 표현으로 ‘내일 모레 마흔’이다. 1988년생인 나는 항상 ‘낀 세대’라는 자의식이 있다. 어느 시대나 ‘후반생’들은 ‘구시대의 막내’ 같은 위치를 점하지만 80년대 후반생들에겐 특히나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81년생부터 2012년생까지’ 라는 밑도 끝도 없이 너른 나이대인 ‘MZ 세대’에 포섭될 때면 어딘가 석연찮지만, 젊은 세대의 한 축으로 호명되는 것 같아 나쁘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 MZ가 ‘눈치와 염치 모두를 상실한 자기 주장 강한 후배’로 통용되자, 나는 MZ를 쉽게 타자화했다. 함께
3년 전, 나는 일간지의 국제부 기자로 일했다. 당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크림대교 폭발 붕괴를 기화로 확전 양상을 띠고 있었고, 출입처가 분명치 않은 국제부에서 나는 자주 전쟁 기사를 쓰게 됐다. 외신들을 읽어가며, 양국의 주요 정치인들과 취재 기자들의 SNS를 팔로우해가며, 낯선 무기 관련 용어들을 찾아가며 꾸역꾸역 기사를 썼다. 시시각각 사람들이 죽어난다는 전장을,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상태로 남의 말에 의존해 다루는 일은 내게 일말의 기묘함을 안겨주었다. 전황이 번져 야근이라도 할라치면, 나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는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시절, 정 발제가 없을 때는 핸드폰의 캘린더 어플을 켰다. 매년 돌아오는 일정에 맞춰 쓰는 기사를 ‘캘린더성 기사’라고 한다. 보통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에 맞춰 쓰지만 특정 행사나 사고가 일어난 시점이 돌아올 때도 쓴다. 대통령 취임 1주년, 참사 10주기에 맞춰 그간의 일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짚는 역할을 한다.올해는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째가 되는 해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에 “페미니즘이 리부트되었다”고 쓴 게 2015년 9월의 일이다. 이후부터 페미니즘 재시동·재부흥의 의미
“가장 가까워야 될 청년 세대들이, 특히 남녀가 편을 지어 다투는… 괜히 여자가 남자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여자가 여자를 미워하는 거 이해하는데, 그럴 수 있잖아요, 그죠? 여자가 남자를, 남자가 여자를 미워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청년의날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2030 청년 소통·공감 콘서트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대통령이 눈치 보듯 좌우를 살피며 하는 이야기에, 좌중에서는 웃음도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웃을 일일까. 관련 영상과 기사가 나가고, 많은 여성들은 분
장면 하나. ‘현장에서 그늘만 쫓아다니는 그녀들’, ‘막내 작가에게 히스테리 부리는 그녀들. 그렇게 당하고 보고 배운 막내 작가는 결국 다시 제2의 그녀가 되어간다.’ 지난달 블라인드의 MBC 게시판에 올라온 글들의 일부다. 블라인드는 이메일로 자사 직원임을 인증해야만 가입이 가능한 익명 커뮤니티다. 해고된 방송 작가의 복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에, 블라인드의 MBC 직원들은 이들을 향한 혐오 발언으로 답한 것이다.장면 둘. 지난해 9월 15일 사망한 딸의 1주기를 앞두고, 고(故) 오요안나 MBC 기상캐스터의 어머니 장연미씨는 딸이
장슬기 기자가 쓴 지난 20일자 기사 을 읽었다. 이재명 정부 들어 대통령실 브리핑을 생중계하면서 예견됐던 부작용들이 현장 기자들의 목소리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대통령실 VS 기자’라는 대결 구도가 부각되고, ‘기레기 참교육’ 하는 식의 기자를 향한 멸칭이 난무하는 쇼츠가 제작된다. 댓글로는 기자의 ‘수준’을 의심하거나, 기자의 질문을 두고 ‘내로남불’이라며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는 식의 조소가 넘실댄다. 여기에 여성 기자들에게는 성희롱성 ‘얼평’(얼굴 평가)까지 추가된
편집국 내근을 할 때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전화를 건 여성은 한 때 방송인이었으며,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곧 결혼을 준비하는데, 이전에 했던 결혼 기사가 온라인에 남아 있어서 난감하다고 했다. 본인은 과거 유명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지금은 방송 활동도 안 하는 ‘일반인’인데(본인 표현이었다) 기사를 삭제해 줄 수 없느냐는 얘기였다. 그의 간곡한 어투에서는 간절함이 느껴졌고, 나 또한 이해 되는 바가 있었다. 편집국에 이야기를 전했을 때, 나 포함 그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의 과거 결혼 사실은 언론이 늘
한 달 간 대학 학보사의 기자들과 기사 작성 수업을 했다. 그들은 고민이 많았다.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인터뷰이가 보여 달래요.”, “기사 방향을 먼저 알려줘야 통계를 주겠다는데 어떻게 하죠?” 같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기자 초년병 때 나도 궁금했던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것들이기도 하다. 수직적 위계가 두드러지는 편집국 내에서, 그런 걸 선배들에 물어보면 왜인지 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 수업은 테마를 ‘저널리즘 윤리’로 잡았다. 한국의 기자들이 번역한 책 『윤리적 저널리즘을 위한 뉴욕타임스
주말 새, 책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를 읽었다. 리얼리티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연출한 권성민 PD가 쓴 책이다. 책은 극단화된 여론 지형 하에서 어떻게 공동체를 꾸리고 살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 프로그램 제작 후기와 함께 담겼다. 지난해 초 ‘더 커뮤니티’가 OTT에 공개됐을 때, 많은 이들의 소셜미디어에는 프로그램에서 만든 ‘사상검증 테스트’ 결과와 링크가 나부꼈다. 정치(좌파·우파), 젠더(페미니즘·이퀄리즘), 계급(서민·부유), 개방성(개방·보수)의 척도를 나타낸 결과표였다. 나 또한 테스트에도 임해보고,
황혜정이라는 기자가 있다. 2022년 스포츠서울에 입사한 이래 쭉 야구 기사를 써왔다. 프로야구뿐 아니라 ‘사각지대’라 일컬어지는 여자야구의 궤적을 부지런히 좇았다. 지난해 9월부터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서 ‘야구하는 여자들’이라는 타이틀로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을 취재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썼다. 그의 야구 기사는 여자야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남성 일변도의 프로야구를 여성의 눈으로 읽는 일에도 열심이다. 전·현직 프로야구 치어리더 4명을 인터뷰해 날이 갈수록 의상의 노출이 심해지는 한편, 거부할 자유는 사라지는 현실
“퀴어축제에서 만나요.” 광장에서 만났던 이들과 자주 나눴던 얘기다. 대선 국면에서 여성과 퀴어 이슈가 사라져 상심하고 있을 때, 그나마도 위안이 되는 기약이었다. 윤석열 탄핵 광장에서 만들었던 머리띠와 깃발 스티커 등을 ‘무지개 에디션’으로 만들어 축제에서 판매하겠다는 이들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결국 지난 14일에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에 가지 못했다. 비슷한 시각에 열렸던 한국여성학회 춘계학술대회에 갔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아쉬움이 일었다.그러나 올해 퀴어축제의 언론 보도는 나같은 불참자의 아쉬움을 상당 부분 덜어줬다. 2
어느 때보다도 공약이 없는 선거였다. 탄핵에 이은 조기 대선임을 감안해도 그랬다. 성평등 공약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반해, 서로를 향한 ‘여성혐오’ 논쟁에는 불이 붙었다. 언론은 후보들에게 없는 공약을 묻는 입이자, 무엇이 혐오인지를 판단하는 가늠자 역할을 해야 했다. 적어도 혐오를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역할은 삼가야 했다.3차 TV 토론 당시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여성 성기 관련 발언은 명백한 성폭력이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아들이 쓴 댓글을 인용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나, 진위 여부를 떠나 공론장에서 발화되어선 안 되는
지난달 4일,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윤석열 퇴진 광장은 닫히지 않았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집회에서, 강남역 살인 9주기 추모 집회에서, 경북 구미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 농성장에서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터져 나왔던 목소리들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 광장을 계기로 ‘말벌 시민’들이 된 이들의 연대도 계속된다. 내란 국면을 거쳐 자신들과 비슷한 약자들의 사정을 알게 된 이들이다. 한 번 닿았던 발걸음은 멈출 수가 없었고, 모르던 시절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그러나 6·3 조기대선 국면으로 넘어가
‘한덕수’가 너무 많다. 보도량 말이다. 기사건 뉴스건 죄다 한 전 총리의 행보로 도배가 됐다. 실제 총리직 사퇴는 지난 1일, 출마 선언은 2일에 했다. 그러나 지난달 4일 윤석열 파면 선고 직후부터 ‘한덕수 대망론’(매일일보 2025년 4월7일), ‘한덕수 차출론’(조선일보 2025년 4월8일)이 슬금슬금 올라오더니 각종 ‘단독’이 붙은 출마 시점을 예고하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로 종편을 위시한 보수
국민의힘의 ‘입틀막’이 점입가경이다. 대선 경선에 출마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정책 비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뉴스타파 기자 질문에 “됐어. 답 안 해”라는 반말로 대꾸하며 자리를 떴다. 다음 날 오마이뉴스 기자의 질문에는 “우리한테 적대적인 언론은 맨 마지막에 질문하세요”라며 호통을 쳤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국회의원회관 토론회를 마치고 나오다 이명주 뉴스타파 기자가 “국민의힘이 ‘국민께 죄송하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무엇이 죄송한 것이냐”고 묻자 “누구한테 취재하러 온 것이냐”, “(질문)하시면 안 된다”더니 이
지난 4일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됐다. 선고는 금요일에 났기 때문에, 토요판이 없는 신문사들도 일제히 호외를 냈다. 지난 122일 간 한밤중의 비상계엄 선포, 국회의 두 번에 걸친 윤석열 탄핵소추안 표결 시도,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에 이르기까지 신문사들에서는 호외 정국이 계속됐다. 파면을 알린 호외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1부당 3000원에 거래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윤석열 탄핵 정국은 역설적으로 전에 없이 종이신문이 주목을 받는 시절이 됐다.신문사 입장에서 사실 ‘진짜’는 호외 그 이후다. 당일 속보로 꾸리는 호외 내용은 언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