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을 당한 일본 국민들의 차분하고 질서 있는 모습을 배우라는 얘기들이 국내 언론들에서 잇따랐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정부에 대해 불평 한 마디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보도도 있었다.

이 같은 보도가 과연 사실인지, 한 두 장면을 과장한 왜곡이었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여기서 그 진위 여부를 따지려는 건 아니다. 그보다 나는 재난에 임하는 일본 국민들 모습의 어느 한 부분에서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와 같은 ‘양순한’ 태도가 일본에 천재(天災) 이상의 인재(人災)를 가져왔다는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지진이라는 천재가 분명 엄청난 재난인 건 분명하지만 원전 재난이라는 초거대 재앙으로 만든 것에는 일본 국민들의 ‘정부에 대해 불평 한 마디 나오지 않는’ 온순한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민당 정권이 수많은 비리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수십년간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며, 많은 정치인들이 비상식적인 망언을 하고도 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가령 이번에도 엉뚱한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주지사와 같은 극우파적 시각이 형성되는 뿌리와 구조가 거기에 있다. 그가 심심치않게 뱉어내는 역사 왜곡 발언과 같은 몰상식이 정치의 주류로 선택되는 과정에서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는 것도 비슷한 뿌리에서 나온다.

   
후쿠시마 원전 3호기 폭발장면. ⓒ요미우리 온라인
 
일본은 흔히 ‘부국빈민(富國貧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지만 국민은 가난하다는 뜻이다. 국부의 ‘과실’은 일본 국민에게 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선진국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국민들의 실상은 풍요로운 선진국과는 거리가 멀다. 물가고에 새장같은 집에 갇혀 사는 이들이 ‘선진 일본’ 국민들이다.

그러나 진짜 빈곤은 경제적 측면이 아닌 시민으로서의 의식, 양식에서다. 성숙한 시민사회 형성은 부유한 부르조아가 바탕이 됐다는 것이 서구 나라들의 경험인데,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고속성장한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 경제적 중산층은 있을지 모르나 건강한 시민계급은 형성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 영화들에서 보이는 일본의 시민들의 삶에서도 그 같은 ‘시민의 빈곤’ ‘시민의식의 빈곤’이 보인다. 몇 년 전 개봉된 일본 영화들에 ‘쉘 위 댄스’라는 작품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이를 유쾌하고 흐뭇한 웃음을 자아내는 영화로 보았던 것 같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다. 영화 속 일본인들이 그저 안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이 영화는 일과 가족에 치여 고단한 일상을 사는 40대 가장이 사교춤에 도전하면서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는 내용이다.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일본 중산층, 평범한 일본인들의 삶과 의식을 비춰주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대 중년인 주인공들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말이나 행동이 마치 초등학생처럼 말이나 사고방식이 미숙하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선 회사 상사에 허리를 굽히던 이들이, 댄스교습소에선 젊은 춤 선생의 지시에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절대 순응한다. 굽히는 건 허리 뿐만이 아니다. 의식도 일본국민들이 제1 덕목으로 삼고 있는 와(和)의 정신에 충실하듯, 더 이상 순종적일 수가 없다. 내게는 그런 모습이 영화적인 과장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3호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YTN 동영상 캡쳐
 
앞서 말한 이시하라는 몇 년 전에 일본인들이 국제사회에 대해 '노(No)'할 줄 모른다고 야단을 치는 책을 냈다. 그의 말처럼 일본 국민들에게는 ‘노’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짜 필요한 ‘노’는 국민을 속이고 사고를 은폐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노’야말로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정부와 원전당국에 단호하게 노(No)하고, 노(怒)해야 한다. 그것이 원전 재난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되는 길이다.

그럴 때에야 한국인들도 일본에서 배울 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 역시 양순한 일본인들을 거론하며 한국의 ‘불평분자’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려는 정부와 일부 언론, 천안함 사태에 대한 이성적인 문제제기를 소란과 트집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이들에게 성난 얼굴로 '노(No)'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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