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타프 구멍만 해진다.’

이대희 감독은 가끔 자신의 속이 이만하게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타프 구멍은 두 뼘 길이 안 되는 납작한 쇠막대에 애니메이션 용지를 고정시킬 수 있게 난 작은 구멍. 단추 구멍보다 작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감독이 매일 하는 일이란 긴 시간 동안 끈질기게, 조금씩 작품을 수정하는 일이다.

18일도 그는 남산에 있는 서울 애니메이션센터의 ‘E-DEHI’ 스튜디오에서 컴퓨터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강길호 편집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전날 애니메이터들이 만든 3D 장면을 보면서 보완할 부분을 체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물고기가 흔드는 꼬리의 각도가 좀 더 넓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바로 옆방에서 작업 중인 애니메이터들에게 전달되고 수정에 들어간다. 이 감독의 말을 빌리면 “연기를 다시 해주세요”와 같은 일이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 감독은 이어 한쪽 벽면을 절반 이상 덮은 전지에 그려진 조그마한 사각형 안을 연필로 까맣게 색칠했다. 장면마다 진행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빈 곳은 거의 없었다. 장편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은 이제 9부 능선을 넘어 한 굽이만 남겨둔 상태다.

5년째 제작중, 음식 ‘파닭’에 선수 뺏기다

이 감독은 처음 인터뷰 요청을 받았을 때 걱정을 내비쳤다. “저희는 별로 그림이 안 나올 텐데… 영화촬영 현장처럼 그런 게 아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초기 기획단계에는 그래도 동적이었다.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된 속초 동명항을 찾아가 촬영도 하고 스텝들끼리 워크숍에 가기도 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전체 스토리를 담은 그림책과 테스트 동영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 감독은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횟집에 취직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제작에 들어가 완성 단계에 다다른 지금은 그야말로 ‘엉덩이 싸움’이다. 소설 잘 쓰는 비법을 묻는 질문에 “엉덩이로 쓴다”는 황석영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엉덩이로 그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컴퓨터에 앉아 집요하고 또 집요하게 수정하는 일이 하루 일과다.

남들이 보면 그날이 그날 같고, 변한 것 없이 매번 똑같은 작업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그게 애니메이션 제작의 속성이기도 하고, 그래야 질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2007년부터 기획에 들어간 ‘파닥파닥’은 현재 5년째 제작 중에 있다. 2년 전 거의 다 완성되기도 했지만 캐릭터들의 부자연스러운 연기와 지루한 편집, 시나리오 연출의 문제점이 발견돼 다시 만들기로 과감히 결정했다.
제작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름이 비슷한 닭요리 ‘파닭’이 먼저 히트 치는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났고, 집을 팔아서 제작비를 대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이 감독은 “결국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어요. 처자식 울리는 일이지만 중간에 접을 수는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성공 이후 대기업 투자 관심

그때만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선뜻 지갑을 열려는 곳은 없었다. 삼성벤처캐피털이 장편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에 투자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이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을 낸 뒤 대기업 투자는 뜸해졌다. 그 뒤 ‘마리이야기’, ‘천년 여우 여우비’ 등이 관객을 만나러 왔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그 여파는 오래갔다. 많은 흥행작을 낸 명필름마저 ‘마당을 나온 암탉’(감독 오성윤)을 완성한 후에야 마케팅 투자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감독도 2년에 걸쳐 90여 군데에 달하는 영화사, 투자사, 배급사, 애니메이션제작사, 개인투자자 등을 찾아다니며 투자를 제안했다. 결과는 뻔했다. 이들은 애니메이션이란 말만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서울시의 지원이 아니었으면 시작조차 어려웠을 때였다.

3~4년이 지난 지금과 예전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200만 돌파 이후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시장은 기지개를 펴는 중이다. 올해만 해도 ‘소중한 날의 꿈’(감독 안재훈), ‘돼지의 왕’(감독 연상호) 등 총 3편이 뒤이어 개봉됐다. 이런 풍년은 없었다. 그런만큼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얼마 전에 대기업에서 투자 의향을 밝혀오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투자하면 뭐하나요. 그때 필요했는데….”

감정·액션·대사·회상에  능한  에니메이터들

“통통배를 탔는데 파도가 진짜 눈앞에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거야… 바다에 토한 게 아니라 돛배를 붙잡고 앉은 채로 옷 위에….”

점심 식사 도중, 이 감독과 함께 사전 취재 차 배를 탔다 혼났던 경험을 들려주는 김지성씨는 이곳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총괄하는 3D 테크니컬 슈퍼바이저다. 이펙터(effector) 작업을 담당하는데, 이를 테면 고등어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만드는 일이 그의 몫이다.

김씨의 맞은편에 앉은 문기탁씨는 랜더링 작업을 도맡아한다. 렌더링(rendering)이란 쉽게 말하면 애니메이터들이 만든 3D 데이터를 우리가 극장에서 보는 영상으로 바꾸는 일이다. 한때 2D 애니메이터, 미술팀, PD 등 30명의 스텝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8명의 식구들이 마무리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장편 애니메이션 <파닥파닥>의 주연이라 할 수 있는 고등어 ‘’의 영화 속 캡쳐장면.
 

오후엔 이 둘을 포함해 이 감독, ‘1당 100을 해낸다’는 강길호 편집감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애니메이터들이 작업한 3D 데이터에 적절한 이팩터와 렌더링 작업이 이뤄졌는지를 점검한다. 

문제점이 몇 가지 발견됐다. 배 위 그물이 너무 엉성하게 처리됐고, 바구니에 담긴 활어의 움직임이 갓 잡아 올린 것같이 않게 맹숭맹숭했다. 이 감독은 동명항이 나오는 장면에서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배 한 척을 넣었으면 했다. 하지만 이를 고치는데 한 달 이상이 걸린다는 문씨의 말에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섰다.

3D 애니메이터 4명은 자기만의 색깔도 분명하다. 이 감독의 말에 따르면 수석 애니매이터인 김신형씨가 액션 연기에 강하다면 김수정씨는 감정 연기에 능하다. 한치영씨가 대사가 주를 이루는 장면에 능하다면 막내인 서다영씨는 회상 장면을 곧잘 만든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치열 기자 truth710@
 

서씨는 요즘 여태껏 맡은 일 중에 가장 길이가 긴 30초짜리 장면을 맡고 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올드넙치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인데 생선들의 애정행각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이 감독은 “미국 픽사에서는 애니메이터들을 뽑을 때 연기시험을 본다”며 “이들은 인간의 감정뿐만 아니라 무게감이나 물체가 움직이는 방향에 대한 이해도 깊어야 한다”고 말했다.  

회 씹는 장면 위해 직접 먹으며  소리 녹음

애니메이션 일을 하는 이들의 수입이 넉넉지 않다 보니 보통은 큰 작업을 하면서도 부수적인 일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직 ‘파닥파닥’에만 전념하고 있다.

3D 프로그램 속 가상 카메라는 숨은 스태프다. 애니메이터가 현실에서처럼 카메라 렌즈 크기, 캐릭터와의 거리, 각도 등을 설정하면 카메라가 그대로 캐릭터들의 연기를 촬영한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보는 화면들은 가상 카메라 속 렌즈에 담긴 모습들이다.

애니메이션센터 차원에서 이들을 돕는 이도 있다. 녹음 편집 업무를 담당한 박동주씨다. 만화 속 성우들과 효과음 녹음은 여기서 이뤄진다. 효과음 샘플은 외국에서 제작된 것이 많아 정서적으로 이질감이 들고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대부분의 소리를 이 감독이 직접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녹음실 안에서 회를 먹으며 애니메이션 속 회를 씹어 먹는 소리를 탄생시켰다.

오랫동안 작품을 맡다보니 박씨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관한 애정도 깊다. 관련 예산이 많아져 더 좋은 공간에서 일하게 되고 장비가 들어왔으면 했다. 그는 “센터가 상암DMC로 갈 예정인데 지원이 예전 같지 않다”며 “시장이 바뀐 뒤 복지예산이 많아지면서 우리 쪽 예산은 줄어든 것 같다”며 섭섭해 했다.

 

   
하루에 한 번씩 애니메이터, 편집감독, 3D 슈퍼바이저가 한 자리에 모여 그날 작업한  결과물을 놓고 점검하는 회의를 한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 감독은 애니메이터 회의를 했다. 감독과 스텝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것은 물론, 애니메이터들끼리 서로의 보완점과 배울 점이 뭔지 알기 위한 자리다. 지금은 일정이 빡빡해진 탓에 중단됐다.

이는 그가 소위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업체 격인 회사에 다니면서 겪었던 애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란 말에 “필요 없어. 미국에서 하라고 하면 해”라든지 혹은 “억울하면 감독 돼”라는 반응은 번번이 의욕을 꺾었단다. ‘그냥 돈이나 벌자’는 심정이 들기 쉽다. 

미 일본 하청 업체 경험으로 ‘밤샘 금지’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밤샘 작업도 금지했다. 대개 애니메이터들은 낮과 밤이 바뀐다. 이런 삶은 인간관계로 소원하게 만들뿐더러, 건강도 나빠진다. “일 양으로 봤을 땐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거랑 다름없어요. 근데 몸은 버려요. 35세 감독들이 당뇨에 걸리거나 간이 안 좋은 경우를 많이 봤어요.”

조직에 피와 에너지가 돌게 하는 심장이 되고 싶다는 이 감독은 이미 대학 시절 같은 학생들을 끌어 모아 단편 애니메이션 ‘페이퍼보이’를 완성한 적이 있다. 9분의 작품를 만들기 위해 30명의 제작진을 꾸렸고 작화 매수가 무려 3만5천장에 달하는 매우 ‘노동집약적’ 작품이었다.

 

   
이대희 감독이 제작기간 동안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멋쩍게 웃는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 작품은 당시 ‘앙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되기도 해 화제가 됐다. 기쁨은 뼈아픈 질책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프랑스 현지에서 상영됐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애니메이션이 끝날 무렵 자리에 앉아 있던 관객은 단 2명이었다고. “눈물 났죠. 그래서 ‘파닥파닥’에 대한 관객 반응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떨려요.”

일찌감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이을 기대작으로 꼽히는 ‘파닥파닥’은 횟집 속 생선들의 이야기다. 산 채로 죽임을 당하는 생선들의 심리와 자유를 향한 갈망을 3D 애니메이션과 뮤지컬 형식의 2D에 담았다. 횟집 수족관 탈출을 꿈꾸는 ‘고등어’와 수족관 내 기득권 세력인 ‘올드넙치’가 주인공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과 그에 따른 대가”란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 했다. 반전도 있다. 궁금하겠지만 더 이상은 내년 개봉 때 확인하시라.

횟집 생선의 자유 찾기 ‘파닥스러운 소리 찾아라’

저녁 7시 이 감독은 편집 감독과 함께 대학로를 찾았다. 이 작품에서 뮤지컬 음악을 제외한 배경음악과 편곡, 믹싱 작업을 담당하는 유희천 음악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다. 세 번째 만나는 그들의 만남엔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다. 수정한 곡을 들어봤느냐는 유 감독의 말에 이 감독은 “차근차근 말하겠다”며 진지하게 답했다. 유 감독은 감독님들이 주저하거나 신중한 표현을 사용하면 ‘작업이 잘못 됐구나’라는 느낌이 온다며 웃었다.

인디밴드 출신인 이 감독은 음악 선택에 깐깐했다. 영롱한 비브라폰이 마음에 들지만 높은 음역대가 없어서 고민하자 유 감독은 어떻게든 만들어보겠다며 시름을 덜어줬다.

 

   
대학로에 있는 유희천(왼쪽) 음악감독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배경음악과 믹싱작업을 점검하며 의견을 나누는 이 감독. 이치열 기자 truth710@
 

유 감독이 “문제의 씬”이라고 한 부분에선 둘 다 말이 많아졌다. 뮤지컬에서의 합창 부분인데 유 감독은 이 부분에서 쓸데 없는 보이스 소스가 너무 많다고 했다. 게다가 정식으로 합창하지 않고 목소리들을 합쳤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웠다. 이 부분은 좀 더 스케일 있고 웅장하게 바꾸기로 결정했다.

음악은 전체적으로 몽환적이고 음울했으며 가끔은 그로테스크했다. 생선들의 심리가 많이 반영된 ‘파닥파닥’은 음악도 심리 묘사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날 이 감독은 “멜로디 라인이 조금 더 살아야 될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매우 어려운 주문도 했다.

“여느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가 많아요. 좀 더 ‘파닥스러운’ 소리였으면 해요.”

이 둘은 작업이 끝나고 급조된 술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아까는 다소 서먹했던 이들이 소주 한두 잔을 먹으면서 사뭇 달라졌다. 손을 꼭 부여잡고 도원결의 비슷한 포즈를 취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