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이 딱 4개만 나오던 시절. 크리스마스엔 맥컬리 컬킨 주연의 ‘나홀로 집에’ 시리즈가, 설날과 추석엔 ‘청룽’ 주연의 영화가 꼭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이는 TV 편성의 ‘아이디어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지금 TV엔 수십 개의 채널이 돌아간다. 영화관에서 놓친 최신작을 얼마 후엔 TV로 만나볼 수 있다. 시청자에겐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하지만 지상파 TV 명절 프로그램은 여전히 구태의연한 기획이 넘친다.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프로그램은 ‘재탕’ 일 가능성 100%!

아래는 기자가 꼽은 추석때 TV에서 안 보았으면 하는 프로그램 베스트 6이다. 다분히 주관적인 ‘지적질’을 웃고 넘기시라.

1. 다문화 가정 며느리 추석맞이 “우리 시어머니가 제일 좋아요”

추석 때마다 한국으로 ‘시집’ 온 다문화 가정 며느리 추석맞이를 스케치하는 프로그램은 단골 소재였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사를 통해 말도 물도 설은 곳으로 온 이주 여성들의 고단한 삶은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방송사 추석용 프로그램은 그들의 가슴에 고인 눈물은 애써 외면한 채 한국인이 원하는 ‘모범사례’만 콕 짚어 제시한다.

이주 여성이 시어머니의 꼼꼼한 지도 아래 제수용 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모습,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다른 이주 여성들과 모여 한국의 좋은 점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시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모습. 맨 마지막에 명절이라 고향이 생각난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좀 솔직한 편이다.

   
이주며느리 추석맞이를 조망한 9월 6일자 KBS 뉴스.
 
한국인이 원하는 ‘모범답안’만 제시하지 말고 이주여성들이 모여 한국의 짜증나는 명절 풍습 ‘남자는 누워 TV만 보고 여자는 쉴새 없이 음식을 차려야 하는’ 등의 불합리함을 시원하게 꼬집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온건한 '미녀들의 수다'보다 발칙한 ‘이주 며느리들의 수다’가 보고 싶다.

아니면 아예 며느리들의 고향으로 보내주는 통 큰 시어머니의 모습은 어떨까?

2. 아이돌을 위한 아이돌에 의한 아이돌의 TV

남자 아이돌이 몸의 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운동장 트랙을 숨이 막힐 때 까지 전력질주한 후 날리는 청량한 미소는 분명히 아름답다. 누구나 누렸지만 너무도 짧아 안타까운 '청춘'의 한 순간을 응집시켜 놓은 듯한 그 한컷은 누나들의 가슴 한켠을 사정없이 치고 지나간다.

   
13일 오후 5시 30분 방영 예정인 MBC '아이돌 육상선수권대회'
 
평소 늘 섹시한 모습으로 무대를 누비던 여자 아이돌이 화장기 없는 얼굴로 얼굴이 일그러질 때까지 뛰는 모습도 신선하긴 마찬가지다. 열심히 하는 모습은 아름다우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아이돌은 달리기까지 잘해야 살아남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짠하다.

떠야하는 아이돌과 몸사리지 않을 출연자가 필요한 방송사의 손익계산서는 일치했다. 아이돌은 뭘 시켜도 다한다. 심지어 이번 추석 한 방송사는 아이돌들의 마술 대결쇼를 준비했다. 노래 춤 연습하랴, 행사 뛰랴, 운동도 잘해야 하고, 마술도 하고...무한 경쟁 시대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누나들의 마음은 안타깝다.

3. 사극 총정리 참고서

기자의 가물가물한 기억으론 설날엔 지금은 종영된 KBS 대하사극 ‘백제영웅 근초고왕’ 총정리편이 나왔다. 긴 호흡을 가진 사극의 특성상 새로운 시청자들을 공략하기 위한 참고서용 프로그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절마다 되풀이되는 사극 총정리 프로그램은 ‘시간 떼우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MBC 드라마 '계백'의 한 장면.
 
차라리 잘 만들어진, 모두 같이 보면 좋을 프로그램을 다시 보고 싶다. 온 가족이 다 모일 황금 같은 시간 언젠가는 누군가의 부모가 될 것이고 이미 경험하고 있을 모두를 위해 EBS '60분 부모'의 하이라이트 같은 뜻 깊은 프로그램은 어떨까?

4. 아나운서 ‘재롱잔치’

‘엄친아’ ‘엄친딸’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아나운서들은 그간 일반 시청자에게 경외감을 선사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이 땅으로 내려와 몸소 일반인들과 ‘부대껴주기’ 시작했다. 대세가 되어버린 깐족남 전현무 아나운서와 제 2의 전현무가 되고자 팬티만 입고 비욘세의 춤을 추기도 하는 남자 아나운서들. 그들의 망가짐을 보는 것은 즐겁지만 한편으론 불편하기도 하다.

   
지난 설에 방영되었던 MBC 설특집 프로그램 '2011 스타댄스대격돌'에서 비욘세의 춤을 선보인 MBC 이성배 아나운서.
 
뉴스가 예능이 되어버린 시절. 스타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아나운서는 2011년 대한민국의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제 2의 손석희'가 되고 싶다던 김성주 아나운서는 프리랜서가 되어 종횡무진 케이블을 누빈다. 점점 아나운서들은 손석희보다는 전현무 김성주의 길을 원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5. ‘아이들’ 섹시댄스

올 추석엔 제발 안 봤으면 좋겠다. 고작 6~7살 먹은 아이들이 입술에 빨간 색을 바르고 배를 훤히 드러내고 밸리댄스를 추는 장면. 개그콘서트의 에로배우 ‘세레나 허’의 끈적한 목소리를 흉내내는 장면. 섹시 가수를 흉내내는 장면.

   
SBS '스타킹' 지난해 6월 방송 장면.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배운다. 때로는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까지도 따라해 민망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허리를 배배꼬며 춤을 추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하의실종’ ‘꿀벅지’라는 여성의 몸을 지칭하는 속어가 버젓이 찬사로 쓰이며 언론에 등장하는 현실을 오버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아이다웠으면 한다’라는, 너무도 당연해 식상하게 느껴지는 말을 꼭 꺼내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냥...아이 같았으면 좋겠다.

6. 대통령 부부 눈물 그리고...키스

지난해 추석 우리는 공영방송이라는 KBS에서 대통령 부부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가난한 시절 희생으로 자신을 키워주신 작고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눈물 흘리던 대통령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애틋했다.

하지만 때론 이미지는 진실을 잠식한다. 대한민국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갈등 속에서 대통령의 눈물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대통령도 사람이니 눈물을 흘릴 수는 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되는 순간 그 눈물은 이미지가 되어 또다른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국민은 대통령의 눈물 보다는 4대강, 한진중공업 사태, 위키리크스의 진실 등이 알고 싶다.

그리고 키스는 부부만 있는 공간에서 했으면 좋겠다... 응?

   
이명박 대통령 부부는 지난 3일 서울 잠실 야구경기장을 찾아 전광판에 중계되는 키스타임에 깜짝 키스를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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