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취재를 결심한 데는 얄팍한 계산이 있었다. 미얀마는 위험한 듯 보이지만 결코 위험하지 않은 나라였다. 만약 당신이 군부정권에 위협이 될 발언을 하거나, 그런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다가 걸리면 꽤 험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추방되거나,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총에 맞을 수도 있다. 2007년 일본인 사진기자는 반정부 시위대를 찍다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길가에서 폭탄이 터지고 머리위로 포탄이 쏟아지는, 예측하기도 피해보기도 어려운 그런 종류의 위험을 말하는 거라면, 미얀마는 결코 위험하지 않은 나라다. 되레 치안이라면 확실했다. 확인해본 결과, 총선 부정시비와 아웅산 수치 여사 석방 문제로 뒤숭숭하던 11월초에도 미얀마에는 관광객들이 정상적으로 드나들었다. 군부정권에 외국인 관광객은 달러 공급원이었다. 군부도 그들까지 건드리지는 않았다.

   
  ▲ 국민일보 11월15일자 1면.  
 
   
  ▲ 국민일보 11월15일자 3면.  
 
그래서 기자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한 미얀마 취재는 위험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기자 티를 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일이라면 어쩐지 자신이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15년 기자생활에서 기자답다는 말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어머, 기자였구나”에 가까운 말을 훨씬 많이 들었다. 그게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건 이번에 제대로 확인했다.

그래도 들어갈 때는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유혈진압이 이뤄진 2007년 샤프론 혁명 직후 미얀마 취재를 시도했던 김영미 다큐멘터리 PD는 내게 “기자 티가 나는 건 아무 것도 들고 가지 마라”고 말했다.

충고대로 했다. 찾아두었던 미얀마 관련 자료는 추리고 추려 기사 쓸 때 필요한 팩트 몇 개만 컨닝페이퍼 작성하듯 수첩 귀퉁이에 적어뒀다. 명함은 한 장도 넣지 않았다. 현지에서 만날 취재원 연락처는 작은 종이에 쓴 뒤 속옷 봉지 속에 감췄다. 한국에 돌아올 때도 미얀마 사진을 담은 USB는 일부러 냄새나는 빨랫감 속에 넣었다.

문제는 노트북이었다. 기자가 취재를 가는 건 기사를 쓰기 위해서다. 불행하게도 컴퓨터 세대인 나는 손으로 기사 쓰는 게 자신 없었다. 그렇다고 취재원 연락처까지 숨겨놓고 노트북을 버젓이 들고 가는 건 우스웠다. 고민 끝에 노트북도 두고 가기로 했다. 7부바지, 꽃무늬 셔츠, 모자, 성능 떨어지는 디지털카메라, 미얀마 가이드. 꾸려놓고 보니 완전히 관광객 짐이었다.

그런 준비 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미얀마에서 나는 꽤나 자유로웠다. 입국 심사대에서 여러 사람이 걸려 짐 검사를 받았지만 무사통과했다. 수치 여사의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사무실을 드나들 때도 주목받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 티 나게 서있던 사복경찰들 중 내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는 듯했다. 이유는? 알기 어려웠다. 그저 운이 좋았거나, 내가 촌스러운 주름치마를 걸친 아줌마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민일보에 사진을 제공했던 김성광 프리랜서 사진기자는 “형사들이 너무 따라붙어서 호텔 밖으로 나가기가 겁난다”고 하소연했다. 신분을 위장해야 하는 곳에서 거대한 사진기를 든 사진기자는 펜 기자에 비해 훨씬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문가용 사진기가 없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교민의 말을 들어보니, 수치 여사 석방을 구경하기 위해 자택 앞을 어슬렁거렸던 한국인 관광객들 뒤에도 형사들이 따라붙었다고 했다.

어쩌면 현지 안내를 도와준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들의 위장술 덕이었는지도 모른다. 양곤에서 만난 청년 운동가들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들은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무엇을 보고 어디로 가야할지 알려줬다.

   
  ▲ 이영미 국민일보 특집기획부차장대우  
 
수치 여사 자택 앞 골목에서도 언제 앞으로 나가거나 물러설지를 알려준 게 그들이었다. 자신들과 통화가 가능하도록 선불 휴대전화 심(sim)카드를 사다 주고, 외국인 티가 나지 않게 택시기사와 흥정까지 해줬다. 수치 여사의 동선을 알려준 것도, NLD 관계자와의 안전한 인터뷰 장소를 주선해준 것도 모두 그들이었다.

한국에서 온 생면부지의 기자를 성심껏 안내한 건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NLD 원로의 말처럼, 고립된 미얀마에는 “국제사회의 도덕적 지지”가 가장 절실했다. 그걸 이끌어내려면 미얀마 상황을 세계에 알려야 했다. 그들은 나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오기 전 안내자 중 한명은 내게 “미얀마를 보러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1987년 6월 서울에는 수많은 외신기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외신기자가 돼 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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