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문제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최근 펴낸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일간지 광고가 ‘원천봉쇄’ 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삼성의 기업문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다.

작년 연말부터 삼성 기업문화의 빛과 그림자를 잘 드러내주는 몇 개의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는 이건희 전회장의 외아들 이재용씨가 삼성전자의 부사장 겸 CCO(최고 운영 책임자)로 승진한 것, 둘째는 이건희 전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특별 사면 받은 것, 셋째는 얼마 전에 삼성전자의 부사장 한 분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 넷째는 삼성전자가 글로벌 1등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 사회평론이 만든 김용철 변호사의'삼성을 생각한다'  
 
자살 사건부터 살펴보자. 최근 어느 주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자살한 고인의 유서에는 ‘업무에 대한 중압감’ 외에 ‘회사 경영진에 대한 불만’이 함께 담겨 있다고 한다. 고인 주변의 관계자 말에 따르면, 고인은 업무 부담이 너무 과중해 감당하기 힘들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었으며, 고인 주변은 ‘곳곳이 지뢰밭’ ‘도처에 폭탄’ 등이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보도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고인이 “경영진이 (나를)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다”고 주변에 호소했다는 점이다.

고인은 원래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분야의 기술 개발 책임자로 있다가 2009년 초 LSI연구소장으로 발령받은 바 있고, 그랬다가는 다시금 올해 초에 삼성 기흥공장에서 파운드리 사업 부문을 총괄하게 되었다고 한다.

   
  ▲ 경향신문 1월27일자 11면.  
 
이미 삼성은 2009년 12월 초에 반도체 파운드리 산업을 차세대 신성장산업의 하나로 연간 2배씩 성장시킨다는 사업구상을 발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IT 시장의 조사기관인 ‘IC인사이츠’가 얼마 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이 2009년 3억 2,5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면서 전 세계 파운드리 업체들 중 9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 결과는 2008년과 비교해서 -12%의 후퇴를 했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한국의 ‘동부하이텍’은 3억 9,500만 달러 매출(-19%)로 업계 6위를 기록했다.

파운드리(foundry)란, 요즘에는 흔히들 LSI라고 부르는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제품을 위탁받아서 생산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에, 제조공장 시설을 갖지 않고 설계만 전문적으로 담당해서 위탁생산을 발주하는 쪽을 팹리스(fabless)라고 부른다. 아마 팹이란 제작 내지는 제조(fabrication)의 줄임말인 듯하다. 컴퓨터 유저들에게 잘 알려진 그래픽카드 제조사인 엔비디아(nVidia)같은 회사가 대표적인 팹리스 회사라고 한다.

고인이 자살을 선택한 다음 며칠 뒤에는 삼성전자가 굴지의 외국 기업들을 제치면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로 등극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매출은 100조 원이 훨씬 높고, 영업이익도 10조 원을 넘는 실적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성전자 전체의 실적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 분야에서 거둔 초라한 성적과 아주 대조된다.

따지고 보면, 파운드리 사업 분야에서 삼성의 실적은 다른 업체와 비교해서 나쁜 편이 결코 아니다. 삼성전자의 실적은 퍼센트로만 비교하면 동부하이텍보다 더 좋다. 또 200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파운드리 산업 전체가 부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분야에서 삼성전자의 실적은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기술과 영업기밀이 2005년부터 장비납품 업체를 통해 무더기로 빼돌려진 사실이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특히 파운드리 사업에는 아주 치명적이다. 팹리스 업체들로서는 자기네의 설계 자산의 보안을 유지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기밀 유출 사건은 고인이 파운드리 사업을 맡기 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결국 고인에게는 아주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 중앙일보 2월4일자 1면.  
 
한편, 이건희 전 회장은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 내막을 폭로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 와중에서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바 있다. 이게 2008년 4월의 일이다. 그 뒤 이건희 전 회장은, 그보다 한참 전에 벌어진 사건들, 즉 에버랜드 및 삼성SDS 등의 주식 처리 문제와 관련된 사건에서 일부분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2009년 8월에 징역 4년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그 형의 집행을 유예 받았고, 급기야 2009년 연말에는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특별 사면을 받았다. 특별 사면된 이건희 전 회장은 올 1월 초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국제 멀티미디어 가전쇼(CES 2010)’에 경영 은퇴로부터 1년 8개월 만에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제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게 기사거리가 되어버렸다.

   
  ▲ 한겨레 1월11일자 16면.  
 
2008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기업은 일본의 도요타다. 그 직전에 엄청나게 규모를 확장했다가 금융위기로 인해서 회사 경영이 휘청거리게 되었고, 창업자의 먼 손자가 다시 기업 경영의 책임을 맡기는 했지만, 급기야는 작년부터 몇몇 차종의 결함으로 인해서 대규모 리콜의 시행과 해당 차종의 생산 자체 금지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품질과 안전의 신화를 거머쥐었던 도요타가 이제 기업 차원의 위기관리에 실패해 버렸다는 것이 안팎의 공통적인 평가다.

삼성전자의 부사장이 자살했다는 사건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삼성의 기업문화가 얼마나 조직 구성원들을 쥐어짜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위기다. 나는 삼성이 도요타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런데, 삼성의 조직문화는 기업의 상층부만 쥐어짜 온 것은 아니다. 아래도 쥐어짜 왔다. 이건희 전 회장이 특별사면 되던 날 아침에, 이종란 노무사라는 분이 불법 강제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 이종란씨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경찰은 작년 7월 수원 삼성전자 앞에서 진행된 ‘고 황민웅씨 4주기 추모제’를 ‘미신고 불법 집회’로 간주하고 이종란씨를 연행한 것이다. 지난 촛불문화제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추모제와 같은 문화행사는 집회 신고의 의무가 없다. 게다가 이종란씨는 다음날 자진 출두할 것을 경찰에 통보한 상태였다.

<반올림>이란 단체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 다섯 명을 포함해서 노동자의 건강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고발해 왔다. 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노동자였던 고 황유미 씨의 억울한 죽음을 통해 반도체 산업의 위험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바 있다. 하지만, 반도체 분야에서 백혈병으로 죽은 노동자들은 아직까지 산업 재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1등은 하기도 어렵지만 그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기가 더 어렵다. 그 점을 도요타는 잘 보여준다. 세계가 인정하는 삼성의 장점은 잘 짜인 생산 조직 시스템과 선두를 따라잡는 캐치업 능력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장점은 일찍이 일본 제조업체들이 갖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 일본 제조업체들의 상징적 정점에 도요타가 있었다.

반면에, 사람들이 삼성의 약점으로 공통적으로 꼽고 있는 것은 창의성과 혁신성 부족이다. 이런 점을 스스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과거에 가족을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고 아주 인상적으로 말한 바가 있다.

그런데, 혁신과 창의는 단지 쥐어짠다고 해서, 혹은 몰아붙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철학 쪽 말투로 표현하자면, ‘바깥으로부터의 사유’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법이다.

나는 이건희 전 회장과 이재용 부사장에게 있어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리고 고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서 해야 할 일은 삼성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게 바로 혁신과 창의로 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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