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판 공포의 외인구단
어떻게 생각하면 이 드라마는 익숙한 패자부활전을 색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베토벤 바이러스>가 체현하고 있는 이념은 그렇고 그런 패자부활전의 애수를 넘어간다. 이건 오히려 {공포의 외인구단}에 가까운 정서다. 강인한 지도자가 어중이떠중이 우매한 대중을 단련시킨다는 설정은 확실히 80년대 풍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그 지도자의 강인성에 대해 딴죽을 건다. 그는 말 그대로 ‘외로운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강마에가 원하는 건 뭘까? 패자들에게 화려한 인생의 반전을 선사하는 걸까? 아니면 이들에게 시혜를 베풀어서 자신의 도덕성을 공고히 하려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충 짐작하자면, 이 둘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할 것 같다. 강마에와 ‘거지’ 오케스트라가 갈등하면서 결국 합일을 이루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건 웅혼한 계몽적 서사시를 안방 버전으로 만들어놓은 거다. 문제는 이 드라마의 내용이 이런 걸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호응이다.
▲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장면들. | ||
한국 사회의 대중이 열망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해방적 부르주아’이다. 강마에의 캐릭터는 이런 열망에 조응하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상승기 부르주아의 용맹성은 변화에 대한 순응성의 다른 측면이다. 신분과 세습에 얽매어 있던 귀족사회를 타파할 수 있었던 논리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이건 곧 ‘진보’에 대한 열망이었고, 이런 측면에서 상승기 부르주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적 삶의 논리를 만들어낸 획기적인 계급임에 틀림없다.
강마에가 한국에 제대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하지만 모든 대중이 열망하는 해방적 부르주아의 입장을 드러낸다는 건 그래서 재미있는 현상이다. 그는 자신의 완벽성을 추구하면서 자신이 구축해놓은 남성적 상징계의 질서 내로 타인들을 포섭하고자 한다. 그에게 이건 음악, 그것도 클래식이라는 완벽한 형식미의 음악이다. 이 형식미를 위해 강마에는 음악성이라는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이들을 질타한다. 그의 윤리는 ‘착한 심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는 괴팍하고 신경질적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독설을 퍼붓는 악한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는 ‘도덕적 인간’이라기보다 기성의 도덕률을 수용하지 않고 조롱하는 존재다. 그에게 윤리성을 부여하는 건 바로 ‘아름다움’이다.
대중이 열망하는 해방적 부르주아
‘다크 나이트’처럼 그는 고독한 부르주아이면서 또한 부르주아의 계급성을 초월한다. 그가 원하는 건 지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성이라기보다 끊임없이 그 안정성을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는 충동이다. 강마에의 ‘음악’은 가혹한 현실의 경쟁논리를 이겨낸 뒤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를 암시한다. 패자들이 다시 부활하려면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보편적 가치를 위해 헌신할 때 강마에는 개인의 이해관계를 통해 전체의 이익을 구현하는 완전한 부르주아적 개인으로 탄생할 수 있는 거다. 이와 같은 부르주아 상은 금융위기를 불러온 그 ‘탐욕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것이기도 하다. ‘이상적’ 부르주아의 이미지는 부르주아 계급 자신에게도 부담스러운 거울이다. 강마에는 이런 초췌한 현실을 에돌아 비춰주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